윤회는 없다고? 한 허무주의 스님의 넋두리를 보고
중형급 교회가 하나 있는데
일터로 가는 길에 교회가 하나 있다. 5층짜리 자체빌딩과 십여대를 주자할 수 있는 넓직한 마당을 가지고 있는 중형급 교회이다. 늘 지나다니는 길에 보는 교회에서는 일요일 오전에 주차요원이 교통정리 할 정도로 고정적으로 예배드리러 오는 신자가 많다.
교회에서는 일년에 한 두차례 마당에서 바자회를 열기도 한다. 그리고 주변의 주민을 위하여 무료강습을 알리는 플레카드를 많이 볼 수 있다. 또 65세 이상 되는 노인들을 위하여 무료 급식하는 날을 정해서 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교인들과 그리고 주변의 주민들과 끊임 없이 소통하려 하는 것이 도시에서 볼 수 있는 현주소이다. 그런데 최근 플레카드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유명아나운서와 유명텔런트의 간증을 알리는 광고플레카드이다.
도시의 크고 작은 교회에서는 늘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강습회를 열고 유치원을 만들고, 청소년을 공부방을 운영하고, 노인에게 이발봉사와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 등 주변주민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인사를 초청하여 간증회를 갖음으로서 좀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들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한가?
소통을 거부 하는 불교
도시에서 불교를 찾아 보기 어렵다. 간혹 있기는 하지만 무당집인지 점집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이고 규모 또한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간혹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돌아 다니지만 역시 초라해 보인다. 그리고 안쓰러워 보일때도 있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도시에서 기를 못 피고 사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불교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불자인구가 24%로 가장 많다. 그러나 수도권에서는 기독교에 이어 2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차이가 크다. 오히려 3위인 천주교와 약2%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천주교의 상승추세라면 매년 10년 마다 시행되는 해인 2015년 정기종교인구 조사에서 역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불교는 수도권에서 3위가 되어 ‘3등종교’로 전락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불교가 3등종교로 전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본다. 사람 사는 곳에 절도 없을 뿐더러 스님들이 세상사람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산중에 모두 숨어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중에 있는 절도 사람의 발길이 많아지면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암자를 보면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일까 혼자 사는 스님도 많다. 사람들이 싫어 산에 들어갔는데 대중들이 싫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보니 절은 모두 산중에 있다. 그것도 깊은 산중이다.
스님들은 세상사람들과 소통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같은 스님들끼리도 소통도 거부하는 듯 더 깊은 곳에서 홀로 살고 있다. 이렇게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신선처럼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국의 스님들이다. 그런데 심산유곡에도 있을 것은 다 있다는 사실이다.
산속에 있으나 세상속에 있느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에서 마치 은둔자처럼 살아 가는 것이 한국의 스님들이라 본다. 그러나 깊은 산중에서도 세상과 소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국방방 곡곡 네트워크가 깔리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심산유곡의 사찰에도 인터넷이 된다. 또 하늘에는 위성이 떠 있기 때문에 안테나 하나만 달면 수백개의 채널을 시청할 수 있다. 비록 몸은 심산유곡에 있지만 정보통신기기의 발달로 인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냉방과 난방이 되는 시설이 되어 있어서 도시에서 사는 것 못지 않게 편리하게 지낸다.
오늘날 산속의 스님들은 세상사람들과 소통은 거부하지만 정보통신기기와의 소통은 거부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오염원으로 가드차서 수행에 방해 되기 때문에 깊은 산중으로 들어 가는 것이 정당화 될지 모르지만, 깊은 산중에서 인터넷과 위성방송을 시청한다면 사실상 세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방송과 인터넷에는 세상 보다 더 심한 오염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님들이 무문관에 들어 가지 않는 한 산속에 산다고 하여 오염원으로부터 멀어 진 것이 아니다. 산속에 있으나 세상속에 있느나 똑 같다는 것이다.
지역적 기반이 없는 한국불교
우리나라 스님들은 수행자라기 보다 은둔자에 가깝다. 그것도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는 은둔자이이다. 그런 은둔자에게 있어서 세상사람들과의 소통은 남의 일이나 다름 없다. 그러다 보니 한국불교는 지역적 기반이 없다. 사람 사는 곳에 절도 없고 스님도 없다 보니 지역적 기반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불교에 대하여 전국구라 말한다. 산중에 있으면 전국에서 신도들이 순례 등의 명목으로 찾아 오기 때문이다.
정치에 빗대어 말하면 한국불교는 전국구이다. 지역구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지역구이다. 탄탄한 지역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정치인이 지역구 관리를 하듯이 교회에서는 동네에서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한다. 바자회, 무료 강승회, 간증회 등 틈만 나면 소통하려 한다. 하지만 지역적 기반이 없는 한국불교에서는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지역적 기반이 없다 보니 거꾸로 신도들이 산으로 절을 찾아 간다. 지역적 기반이 없는 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은둔자처럼 사는 이유는?
스님들은 왜 산속에서 숨어 살듯이 지낼까? 공부가 다 되었으면 세상으로 내려 와야 하는데 왜 계속 머무르려 하는 것일까? 아마도 깨닫지 못해서일것이다. 공부가 덜 되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산속에 머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일 깨달았다면 산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깨달은 자는 자비심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은 것을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려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과 자비는 항상 같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계속 산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비심이 없다고 본다. 세상사람들에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세상으로 내려 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속에서 은둔자처럼 평생 살아가는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산에서 내려 오지 못하는 스님들은 스님들이라기 보다 차라리 ‘은둔자’라 볼 수 있다.
노후대책을 걱정하는 스님들
산속의 스님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무엇일까? 놀랍게도 ‘노후대책’이라 한다. 그래서 어른 스님이나 어린 스님 할 것 없이 너너나나 ‘사설사암’ 갖기 경쟁이 붙었다고 한다. 공찰의 숫자는 그대로인데 사설사암이 급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설사암을 가지고 있으면 노후대책이 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후에 대하여 걱정하다 보니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게 되고 문중의 일원이 되어 이권을 갖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파벌이 형성이 되고 파벌간의 종권다툼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한다.
최종적인 판단은 스님몫
최근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불교계에서 비판의 여론이 거세다. 오계를 어긴 승려가 또다시 총무원장이 되고자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박승, 은처승, 폭력승 등으로 인하여 승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승가에 대한 재가의 비판이 거세다. 그런 비판에 승가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마성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썼기 때문이다.
사실 출가자의 일탈에는 언제나 재가자가 관련 되어 있다. 이를테면 도박장을 마련하거나 룸살롱을 주선하는 것도 환속한 자이거나 재가자들이다. 특히 승려 주변에서 온갖 이권에 관여하는 브로커들도 재가자들이다. 이들은 승려의 타락을 부추기거나 함정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어 승려의 공양물, 즉 삼보정재를 빼앗아 간다.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승려에게 접근하여 파계하도록 유혹하는 꽃뱀들도 많이 늘어났다. 독신 승려의 주적은 여자의 유혹이다.
(마성스님, 재가자는 승려의 범계와 무관한가)
세상은 오염원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출가자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들어 간다. 그런 수행자들이 세상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오염원에 노출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종적인 책임은 스님이 져야 한다. 비록 재가자의 농간에 놀아난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인 판단은 스님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님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재가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렇다면 오염된 재가자로부터 출가자를 보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인제도가 있다는데
마성스님은 재가자로부터 오염을 막기 위하여 스리랑카의 예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상좌불교의 전통에서는 지금도 승려 곁에 정인(淨人)을 두고 있다. 승려는 금이나 은 및 화폐를 소지할 수가 없다. 정인이 승려를 대신해 돈을 지불하기도 하고, 승려가 사소한 계라도 범하지 않도록 곁에서 보좌한다. 그래서 승려 곁에는 언제나 정인이 따라 다니며 승려를 시봉한다. 또한 정인은 승려의 파계를 막는 호법신장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마성스님, 재가자는 승려의 범계와 무관한가)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정인제도가 있다고 한다. 정인은 빅쿠 옆에 항상 따라 다니며 시봉하는데, 빅쿠가 범계를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호법신장의 역할까지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정인이라는 제도가 없다. 설령 생겨 난다고 할지라도 스님들이 활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계를 가벼이 여기고 ‘내키는 대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정인제도는 가능하지 않으리라 본다.
아무리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여도
한국불교의 미래는 어둡다. 한국불교는 지역적 기반도 없는 전국구 불교일 뿐만 아니라 스님들이 계를 지키지 않아 사회적으로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적광사미의 폭행사건이 오마이뉴스에 보도 되었는데 이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키기에 충분한다.
아무리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여도 메이저 신문이나 메이져 사이트에서 부정적인 뉴스가 보도 되면 포교활동을 하나마나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지역적 기반도 없고 온갖 범계행위로 인하여 안으로부터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래서일까 비구 아닌 자가 총무원장에 다시 출마한다고 하자 출재가를 막론하고 비판의 여론이 거세다.
승가모독이라고 발끈한 스님
최근 청보리회 김재영 법사는 “스님들은 원래 그래”라는 말을 하였다. 조계사 옆 우정공원에서 개최한 ‘천일 재가결사 포살법회’에서 “(재가불자들이여) 한국불교를 위해 고민할지언정 승단을 위해 마음 쓰고 아파하지는 말자. 스님들은 본래 그랬다. 40년 전, 100년 전, 부처님 계시던 2600년 전에도 그러던 사람들이다.(불교닷컴, 2013-09-28)”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가 보도 되자 반론이 나왔다. 성법스님이 “저는 개인적으로 심한 모욕감을 느껴 반론을 제기합니다.”라고 말함으로서 발끈한 것이다. 한마디로 ‘승가모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신도들도 정신차려야 한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자비로 불교신문에 광고를 내었던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이라는 글을 올렸다.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은 모두 33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1.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그토록 비난하셨던 바라문교 보다 한국불교를 더 질책하실 것입니다. 이제, 한국불교는 업과 윤회의 해석에서 자이나교와의 차이점을 붓다께 분명히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2.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자신이 신격화 된 것에 놀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마지막 당부를 재차 확인시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신神이 아니라, 바른 법과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말했다’.
3.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자신의 몇 대 제자라 자칭하는 이들에게 물어보실 것입니다.
‘내 제자라면 내 가르침을 우선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조사祖師나 선사禪師의 말을 의지하고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4.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주지 자리가 말썽 덩어리인 본사나 큰 절에 거처를 마련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붓다께서는 문중도 없고, 계파에 속하지도 않았고, 절에 연고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5.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신도에게 보시를 강요하는 출가자에게 이렇게 일갈하실 것입니다. ‘내가 머물던 기수급고독원은 이름 그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보시를 베풀던 곳 이니라’ 라고 말입니다.
6.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신도보다 호의호식하는 출가자에게 이렇게 일갈하실 것입니다.
‘재가자가 너를 공경하는 것에 오만하지 말라. 너는 나에 대한 공경을 대신 받고 있는 것 뿐이니라’ 라고 말입니다.
7.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천도재와 영구위패로 신도들을 현혹하는 출가자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나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 침묵했거늘 너희는 어찌 영혼의 구제까지 확언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8.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재가 신도 위에 군림하는 출가자들에게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나는 거의 천 년 동안 이어온 4성제 계급제도를 철폐했거늘 너희는 어찌 바라문처럼 행동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9.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자신이 붓다에 버금가는 깨달음을 성취한 듯 언행하는 출가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깨달은 사문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 가는 사문일 뿐이다’ 라고 말입니다.
10.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해 전법하는 한국의 승가에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 자신이 아니라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바른 법을 전하라고 했다’ 라고 말입니다.
11.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승단과 절의 부富에 대한 집착에 한숨을 쉬실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반역자로 단정하는 데바닷다는 사원에서 음식물을 저장하는 일조차 사치라고 여겼다’ 라고 호통하실 것입니다.
12.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절의 경제적 해결이 우선한다며 신도를 기만하는 출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들의 행위가 방편으로 용납된다면, 재가자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한 비도덕적 행위도 비난할 수 없느니라’
13.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방편이란 명목으로 미신을 조장하고 중생을 불안하게 하는 출가자에게 일갈하실 것입니다. ‘그 방편이라는 것이 실제로 중생을 안심시키느냐? 아니면 너희들에게 이익만 생기느냐? 라고 말입니다.
14.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전생의 업이 현세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라고 믿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바라문들에 의해 사성제 계급제도에 악용되는 전생의 업을 오히려 부정하였다’ 라고 말입니다.
15.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기도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준다’ 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도는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 아니라, 바른 소원인가를 확인하게 해주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16.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12연기는 붓다께서 설하신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단지 연기의 관계성을 말했을 뿐이지, 연기를 12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지 않았다’ 라고 말입니다.
17.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영험설화나 신비주의를 말하는 이들에게 ‘그렇다면 내가 깨달음을 성취한 일도 영험하고 신비스러운 일이냐? 내가 세상에 출현해 고행 끝에 깨닫고, 중생을 교화한 일은 엄연한 사실이니라’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19.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불교의 선․교禪‧敎의 차별에 대해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실 것입니다. ‘출가자로 같은 무소유자 임에도 선을 하면 절에서 돈을 주고, 교학을 공부하면 수업료를 내야 하는 차별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말입니다.
20.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의 출가자의 수준에 이렇게 개탄하실 것입니다. ‘나와 나의 제자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너희는 존경은커녕 세상에 걱정을 끼치고 있지 않느냐’ 라고 말입니다.
21.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불교의 추태에 대해 이렇게 엄한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수행자는 人天의 스승이 되어야 하거늘, 하물며 범인에도 못 미치는 속물俗物의 본성을 드러내느냐’ 라고 말입니다.
22.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이런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내가 입멸한 후 최초의 승단의 분열은 사문의 소금 소지 등 10가지 계율(十事)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너희는 재물이 넘쳐 사문의 위의威儀조차 갖추지 못 하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23.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이런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승단에서조차 인과응보를 실현하지 못하면서 너희는 어찌 재가자에게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강조하며 보시를 유도하고 인과법을 설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24.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승가의 작태에 이런 한탄을 하실 것입니다. ‘선禪수행을 종지로 한다며 내 가르침인 교설敎說을 홀대하고, 계를 범하는 짓을 무애라 포장하며, 지혜 없는 정定만을 추구하는 병통病痛에 걸렸다’ 라고 말입니다.
25.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바른 수행 풍토조차 세우지 못하고, ‘현실적 운운’하는 핑계를 대는 출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현실의 이익을 떠난 마음이 출가일진데, 어찌 너는 현실적이라는 말을 그리 쉽게 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26.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승가의 자정능력에 이렇게 일갈하실 것입니다. ‘세속의 불법不法은 세속법으로 다스리고, 승가의 불법不法은 여법如法하게 다스려야하거늘, 너희에게 여법如法은 찾을 수가 없구나’ 라고 말입니다.
27.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불교에 이렇게 질책하실 것입니다. ‘내가 중생을 위해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설한 것을 최고의 방편이라 말하면서, 어찌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상대의 수준에 맞추지 않느냐’ 라고 말입니다.
28.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승단의 행정에 대해 이렇게 개탄하실 것입니다. ‘승단은 어떤 경우에도 수행자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거늘, 어찌 너희들은 수행자를 통제하거나 수행자 위에 군림하려 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29.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절에서 부자 신도와 가난한 신도에게 다른 대접을 하는 것을 이렇게 개탄하실 것입니다. ‘말로는 물질주의를 개탄하는 출가자가 어찌 신도의 경제적 어려움에 마음의 상처까지 더해주고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30.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 승가에 이런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내 모양을 천개 만개 조성해 복 지으라며 팔고, 사법邪道를 내 말이라고 중생들을 현혹하면서, 정작 내 가르침의 진위眞僞에는 관심조차 없구나’ 라고 말입니다.
31.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승단의 조직에 이런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 구성원은 4부대중이 아닌 4계급제로구나. 총무원 직책과 본사 주지는 바라문, 말사 주지는 왕족, 일반 출가자는 평민, 재가 신도는 천민 아니냐’ 라고 말입니다.
32.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불교의 출가 정신에 개탄하실 것입니다. ‘출가는 일체의 세간의 가치를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출가하면 중생계에서 벗어나고, 더욱 중생 위에 군림하는 지위를 얻는다고 착각을 하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33.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한국의 출가자의 오만을 질책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현명하고 지혜로운 이는 ‘나는 이것 밖에 모릅니다’ 라고 말하지만, 정작 세상의 학문을 모르는 너희는 ‘내 말은 세상의 이치에 틀림이 없다’ 라고 확언을 하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세존 사이트 운영자
대한불교조계종 용화사 주지 성 법
( [기고]김재영 법사의 승가 모독에 반론, 불교닷컴 2013-09-30)
넷상에서 성법스님은 세존사이트(http://www.sejon.or.kr/) 운영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한 때 운영이 어려워 불교관련 신문 사이트에 기사가 나기도 하였다. 자비로 운영하다 보니 서버비용 등이 감당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무료로 자료를 가져 가는 불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업을 부정하는 14번 째 항목
성법스님의 글을 보면 현재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33개 항목 대부분 공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14번 째 항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전생의 업이 현세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라고 믿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바라문들에 의해 사성제 계급제도에 악용되는 전생의 업을 오히려 부정하였다’ 라고 말입니다.”라는 내용은 문제가 있다. 업에 대한 부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법스님에 따르면 업에 대하여 바라문교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으로 인하여 윤회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하였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잘못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명백히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Kammasakkā māṇ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ṭisaraṇā. Kammaṃ satte vibhajati yadidaṃ hīnappaṇītatāyāti.
[세존]
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쭐라깜마위방가경-Cūḷakammavibhaṅga suttaṃ-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Kammaṃ satte vibhajati yadidaṃ hīnappaṇītatāyāti)”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브라만교나 이를 계승한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 그 업을 상속하는 자라 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속적 정견이라 하고 또 다른 말로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그럼에도 성법스님은 “나는 바라문들에 의해 사성제 계급제도에 악용되는 전생의 업을 오히려 부정하였다”라고 하여 부처님이 업에 따른 윤회를 부정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세존사이트에서 놀라운 글을 발견하고
업자성정견을 부정한다면 이는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연기법 부정은 결국 단멸론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법스님은 왜 업자성정견을 부정하는 것일까? 세존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저는 팔만대장경에 수록된 경전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선별하여 우선 순위를 두지 않고 한글대장경을 1권부터 시작하여 무조건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허탈감이 성취감보다 더 무겁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정작 붓다의 말씀은 이것저것 가감된 것을 추려내면 생각보다 방대하지 않았습니다.
논사論師나 조사祖師의 말들은 부파시대의 논사들과 형식적인 접근 논리로 관찰하면 나을 것이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느끼고 확인한 불교를 말하는 것이지, 붓다의 속내를 알고 어느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당위성을 갖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로 제 관점은 베다나 바라문교에서 답을 줄 수 없는 부분을 붓다께서 발견하시어, 최고의 당위성을 인정받으셨듯이 2,500여 년 전에 전래된 한국의 불교를 ‘붓다께서 베다 보듯이’ 점검을 하였습니다.
핵심적인 한 가지만 이런 ‘당위성’ 확보를 전제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붓다께서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힌두교적 윤회를 부정하셨다고 주장합니다.
대단히 전향적인 발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을 해보십시다.
윤회가 있다고 믿는 것과 윤회는 없다는 것이 대립할 때, 어느 쪽이 당위성을 확보하는데 더 보편적이냐가 고려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같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가 불행하게도 불교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지적통찰과, 시대에 확정된 부정할 수 없는 현상과 사실을 모조리 동원해서 당위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중 가장 강력하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과학 뿐입니다.
과학도 중력과 전자기력등과 같이 실제로 작동하는 우주적 실체라야 합니다. 몸무게가 더 나간다면 농담으로 ‘내가 비만해진 것이 아니라, 중력이 좀 더 강하게 내 육체를 잡아 당기고 있다’라고 해도, 이 말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지구의 남반부에 있다면 머리부터 허공으로 떨어져 버릴 겁니다.
윤회가 실재하는 세계라고 당위성을 확보하려면, 붓다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일치에 대해 합리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몇 개의 질문을 만들어 볼까요?
윤회는 6가지의 세계로 나눠지는데, 이것이 붓다가 나누었다는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째서 지금은 5가지도, 7가지도 아닌, 6가지라고 딱 잘라 분류를 하는 것일까요?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도 인간인데, 윤회에 해당되는 것일까요?
미래에 외계인이 발견되거나, 외계 축생이 발견된다면 그들에게도 이미 윤회가 적용되고 있는 것일까요?
대승불교에서는 선악의 구별에 시비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데, 윤회의 과보를 받는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지옥과 천상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가 아닌 실재實在여야 윤회에 합치되는데,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입증해야 하나요?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것은 불과 200만 년 전인데, 그 전에 지구에 살던 공룡등 동물도 윤회에 적용을 받은 것일까요?
지구의 인구는 엄청 증가하는데, 지구의 축생들이 선한 업을 지어 인간이 증가하는 것인가, 아니면 천상의 사람들이 복덕이 다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둥물들이 어떤 행위로 복덕을 쌓아 인간으로 신분이 도약할 수 있는 것입니까?(여러분 곁에 있는 애완견은 분명히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복을 짓고 있으니 제외합시다)
그러나 복제된 동물은 어떻게 윤회의 틀 속에 들여보내야 합니까?
지옥은 갈갈이 찢어진 고통을 육체에 주고 나서, 다시 깜짝할 사이에 복원을 시키는데, 그런 신묘한 기술을 복 짓고 사는 인간에게 주지 않고, 축생보다 못한 인간들을 혼내는데 사용하는 것은 ‘지옥 갈 일’ 아닌가요? 등등....
여러분은 능히 이런 의문을 만들 수 있고, 또 아시는 스님들께 답을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다. ‘윤회는 없다’면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바라문의 사소한 행태에도 당위성과 질책을 하신 붓다께서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윤회를 인정하셨을 개연성은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인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에 윤회가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까?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 많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런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성법스님,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http://www.sejon.or.kr/ )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부처님의 제자이자 출가한 승려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충격적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특히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연기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글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 난 다음 허탈하였다니!
성법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다 읽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허탈감을 느꼈다고 하였다. 왜 그랬을까? 팔만대장경과 빠알리니까야는 다른 것일까? 빠알리 니까야를 읽으면 읽을수록 환희심을 느끼는데 거꾸로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 난 다음 허탈하였다니!
성법스님의 글을 보면 전형적인 회의론이다.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각적인지와 과학적 실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한마디로 보이는 것 만 믿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믿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쓰여진 내용을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윤회사상 역시 힌두교의 윤회사상이 들어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지옥과 천상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가 아닌 실재實在여야 윤회에 합치되는데,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입증해야 하나요?” 라든가 “지구의 인구는 엄청 증가하는데, 지구의 축생들이 선한 업을 지어 인간이 증가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한다. 한마디로 쓸데 없는데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말룽끼야뿟따경에서 “이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열 가지에 형이상학적 사항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는 것과 같다.
한 허무주의 스님의 넋두리
성법스님은 ‘붓다께서 베다 보듯이’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보았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방대해 보이는 경전이 몇 개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윤회나 재생, 천신, 브라흐마, 야차, 신통 등이 들어 가는 내용을 빼었다고 보여진다. 그런 식으로 분류하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사념처 등 몇 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삼법인과 사성제에는 윤회사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초등학생 같은 발상이다. 괴로움의 소멸은 결국 윤회의 종식이라는 가르침이 있음에도 자신의 방식대로 경전을 재단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 많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런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여 ‘과학적 환원주의’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단멸론이자 허무주의이다. 자신의 깜냥으로 인지된 것만 받아들이고 거기에다 과학적 실증이라는 잣대를 들이 대어 경전을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하여 가르침을 오도하는 것이다. 한 허무주의 스님의 넋두리이자 옹알이를 보는 듯 하다.
2013-10-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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