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주의와 근본주의 불교를 위하여
책을 읽었는데
불교를 접하고 이런 이런 책을 보았다. 주로 지역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빌린 책이기에 한 번 빌리면 여러 권을 빌렸다. 마치 책 쇼핑하듯이 제목이 마음에 들면 골랐다.
그러나 끝까지 읽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도중에 그만 둔 책이 대부분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사 보지 않고 빌려 보게 된 것이다. 책을 사 놓았으나 그 중에 건지는 것은 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역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중에 ‘허공의 몸’이라는 책이 있었다. 지명스님이 지은 책이다. 1993년 불교방송이 개국 되고 나서 교리강좌를 하기 위한 원고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래서 아함경에서부터 대승경전에 이르기 까지 교리를 총망라 하였다. 그 중에 화엄경을 요약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허공이 다할 때 까지’로 설명되는 보현행원이 인상적이었다. 보현행원 10대 발원문에 대한 것이다.
보현행원 발원문을 보면 감동적이다. 허공계가 다할 때까지 중생구제를 발원한 대목에서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동은 감동으로 그쳤다. 현실과 책의 세계는 달랐기 때문이다.
우주적 스케일의 발원
전재성박사의 십지경을 보고 있다. 화엄경에 여러 품이 있지만 산스크리트어본이 남아 있는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다. AD50년에서 150년 사이에 편찬 되었을 것이라 보는 십지경에서 첫 번째에 해당되는 환희지가 있다. 전재성 박사는 이를 ‘큰 기쁨의 지평’이라 번역하였다.
왜 큰 기쁨의 지평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보살로서 큰 발원을 하였기 때문이다. 열 가지 발원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보현행원의 모태로 볼 수 있다. 보현행원 열 가지 발원에 감동받았듯이 환희지에서 열 가지 큰 발원 역시 감동적이다. 열 가지 대발원 중 첫 번째 것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가 이러한 큰 기쁨의 지평 위에 확립되면, 이러한 크나큰 서원, 크나큰 결심, 크나 큰 여윔을 성취합니다. 즉, 남김 없는 모든 일체의 깨달은 님을 공양하고 공경하기 위하여, 일체의 승묘한 형태를 갖추고, 숭고한 믿음을 정화하고, 법계와 같이 광대하고, 허공계를 구경계로 하고, 미래의 끝을 궁극으로 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일체의 우주기에서 수많은 부처님의 출현에 따라 수 많은 공경을 게을리 하지 않는, 첫 번째 크나큰 서원을 일으킵니다.
(I. 큰 기쁨의 지평, 십지경, 전재성박사역)
첫 번째 서원은 일체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식이 많이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 되고 더구나 우주기, 허공의 끝, 미래 끝 등 우주적 스케일이다.
우주적 스케일의 발원에 대한 것을 보면 ① 일체 부처님께 공양하는 원 ② 불법을 수호하는 원 ③법륜 굴리기를 청하는 원 ④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원 ⑤ 중생을 교화하는 원 ⑥ 세계를 잘 분별하는 원 ⑦ 불토를 청정히 하는 원 ⑧ 항상 보살행을 떠나지 않는 원 ⑨ 보살도를 행하여 이익을 주는 원 ⑩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원으로 요약된다.
비현실적 묘사와 장광설
이처럼 화엄경에서는 항상 열 가지로 설명된다. 그래서 하나가 나오면 고구마 줄기가 나오듯이 열 가지가 주르르 따라 나온다. 이와 같은 화엄경의 구조에 대하여 한역 화엄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법정스님은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사실 80권 화엄경을 읽어 내기란 어지간한 인내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처럼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적 묘사에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 놓은 장광설에 질리고 말것이다. 그리고 화엄경의, 구름 일 듯 2백가지로 물으면 병에서 물을 쏟아내듯이 2천 가지로 대답을 하는 그 요설 변재를 감내하기란 참으로 힘이 든다.
(신역화엄경 해제, 법정스님, 동국역경원)
한역 80권 화엄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법정스님의 고백이다. 인내없이는 읽기 어려운 것이라 하였다. 마치 환타지 SF소설을 읽는 것처럼 비현실적 묘사에다, 또 도깨비 방망이 처럼 한 번 치면 열 가지가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말잔치에 질려 버렸다는 것이다.
중생계가 다함이 있는 한
산스크리트어본을 번역한 전재성박사의 십지경 역시 법정스님이 표현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주적 스케일에 환타지소설 같은 구성, 그리고 갖가지 장광설이 읽는 이로 하여금 질려 버리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보살의 열 가지 다짐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의 크나큰 서원은
1) 중생계가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2) 세계의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3) 허공계가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4) 법계가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5) 열반계가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6) 부처님이 출현하는 세계의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7) 여래의 앎의 세계의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8) 마음의 소연이 되는 세계의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9) 부처님의 경계와 앎에 드는 세계의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이고
10) 세상의 전개외 사실의 전개와 앎의 전개로 이루어진 세계의 다함이 있는 한, 다함이 있을 것입니다.
(I. 큰 기쁨의 지평, 십지경, 전재성박사역)
중생계가 다하도록, 세계가 다하도록, 허공계가 다하도록, 열 가지 서원을 다 할 것이라 한다. 이런 문구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 ! “라고 발원한 산띠데바도 이 화엄경 십지경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티벳불교의 수장인 달라이라마 존자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부른다. 본인은 부정하지만 주변에서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보살정신 때문이다. 그래서 달라이라마 존자 역시 산띠데바처럼 허공이 다할 때 까지 중생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도록 영향을 준 게송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닐까 한다.
마음의 대경과 앎에의 듦의 다함과
세 종류의 전개의 다함은 세상에서 끝이 없으니.
나의 서원 다함도 역시 이처럼 되리니.
이것들의 다함처럼 나의 실천행도 같게 할 것입니다.
(I. 큰 기쁨의 지평, 십지경, 전재성박사역)
보살에 행에 대한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말로만 보살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다할 때 까지 실천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발리우드 영화와 화엄경
화엄경은 부처님에 삼매의 경지에서 본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그래서 화장세계, 연화장 세계라 하는데, 중생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보살들에 대한 찬탄과 찬양 그리고 향기롭고 온갖 것들로 화려하게 장엄된 엄청난 스케일의 세계이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장엄된 연화장 세계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 대한 묘사를 보고 환희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 바깥으로 나오면 역시 고통스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전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런 경전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화엄경에 대하여 ‘인도영화’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인도에 ‘발리우드(Bollywood)’가 있다. 발리우드에서 만들어 내는 영화의 수는 할리우드 보다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발리우드 영화는 인도국내용이라 한다. 주로 인도사람들이 보고 즐기는 영화이다.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판타지이다. 아름다운 무희가 출연하여 춤추고 노래하는 즐겁고 행복한 장면 위주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영화속의 주인공이 되는 듯이 신난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고통은 일시적으로 잊어 버린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다시 현실이다. 현실은 환타지가 아니라 소똥으로 가득 찬 길이다. 그래서 잘 못 밝으면 미끄러워 넘어질 지 모른다.
화엄경도 인도영화 비슷한 것이라 한다. 허공계가 다하도록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의 서원이 감동 스럽지만 책에서 빠져 나오면 허탈해진다. 마치 개그콘서트를 웃으며 보지만 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허탈한 느낌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법정스님이 해제에서 “비현실적 묘사에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 놓은 장광설”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화엄경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 세계, 삼매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은 나
보살사상의 구현을 위하여 편찬된 대승경전 대부분이 화엄경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우주적 스케일, 장광설, 비현실적 환타지 등을 특징으로 한다. 또 하나 특징은 개인은 매우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삼천대천세계 등으로 표현 되는 우주적 스케일에서 개인은 마치 갠지스강의 하나의 모래알에 지나지 않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주가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없어도 우주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허공계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대승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객관적 존재이다. 허공속에 있는 아주 작은 존재이다. 그래서일까? 몇 해전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현재 금강대 총장으로 있는 J교수는 “나의 고통은 우주에 비하면 고통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잊어 버리지 않고 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나에게는 우주적 고통처럼 크게 보일지 모르지만, 삼천대천세계 또는 무한한 허공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나의 고통은 너무 미미하기 때문에 고통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말이 대승의 세계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공속 부처님 숫자는?
대승에서 말하는 우주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허공계이다. 그런데 허공에는 부처님이 있다고 한다. 그런 허공은 어떤 개념일까? 불교방송에서 아침에 법문 하는 J스님은 일체가 허공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공기 중에 있는 허공 뿐만 아니라 나의 몸도 허공이고, 또 나의 마음도 허공이라 한다.
그런데 허공 속에 부처님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지켜 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유일신이 연상되었다. 모든 것을 지켜 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그런 선입견이어서일까 그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부처님 대신 하나님을 집어 놓았을 경우 목사가 하는 설교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화엄경 십지경에서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허공속의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
이 큰 기쁨의 지평에 사는 깨달음을 향한 님에게는 크나큰 전망과 원력에 의해서 수 많은 부처님이 나타납니다. 곧, 전망과 원력에 의해서 수백의 부처님, 수천의 부처님, 수십만의 부처님, 수십만나유타의 부처님, 수억의 부처님, 수백억의 부처님, 수천억의 부처님, 수십만억의 부처님, 수십만억나유타의 부처님입니다.
(I. 큰 기쁨의 지평, 십지경, 전재성박사역)
허공속에 한 분의 부처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 수천, 수십억의 부처님이 아니라 수십만억나유타의 부처님이 있다고 한다.
대체 수십만억나유타는 얼마나 되는 수치일까? 각주에 따르면 수십만억나유타는 ‘수십만 꼬띠나유타’라 한다. 이를 수치화 하면 10의 76승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이다. 한량없다는 10에 68승의 ‘무량대수(aparimana)’보다 더 큰 숫자이다.
대지혜광명삼매(mahaprajnaprabhasa)에 들어야
이렇게 화엄경에 따르면 허공에는 10의 76승의 부처님이 있다. 그런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예배하고 섬기고 깨달음을 회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수십만 꼬띠나유타(10에 76승)’에 달하는 부처님을 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 따르면 삼매에 드는 것이라 한다. 삼매에 들어서 허공속의 부처님을 친견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삼매를 ‘대지혜광명삼매(mahaprajnaprabhasa)’라 하였다.
꿈의 비유로 설명되는 대승불교의 세계관
어떤 이는 대승불교와 초기불교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대승불교가 초기불교를 계승한 것이라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부파불교의 문제점을 파사현정하여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라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초기불교에다 대승보살사상을 추가하여 더 발전된 불교의 형태라 한다. 하지만 대승불교를 접하면, 특히 대승경전을 접하면 전혀 다른 불교, 아니 전혀 다른 종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세계관이다.
대승의 세계관은 객관적 세계관이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세간이 있는 것이다. 그 세계에서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는 것이다. 이는 ‘꿈의 비유’로 설명될 수 있다.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는 대승의 세계관을 ‘꿈의 비유(제7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1부, 제8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2부)’로 멋지게 설명하였다.
한자경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꿈을 꾸면 두 개의 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꿈속의 나이고, 또 하나는 꿈꾸는 나이다. 그렇다면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는 어떻게 다를까?
우리가 꿈을 꾸면 꿈속의 나는 꿈속에서의 기세간, 즉 객관적 대상이 어색하지 않다. 매우 익숙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꿈꾸는 나가 꿈속의 나뿐만 아니라 꿈속의 객관적 대상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속의 나와 꿈속의 객관적 대상은 모두 꿈꾸는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꿈속의 나는 철저하게 객관적 대상이다. 그러나 꿈을 깨면 꿈속의 나와 객관적 대상이 모두 꿈꾸는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이 종종 현실에 대하여 꿈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꿈을 깨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
꿈으로 비유로 본 꿈속의 나는 현실의 나이다. 그런데 나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따로 있다. 그것이 꿈꾸는 나이다. 그런 꿈꾸는 나를 만날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꿈을 깨는 것이다. 꿈을 깨려면 꿈꾸는 자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꿈을 꾸는 자는 꿈속에 개입하지 않은 곳이 없고 모든 꿈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허공의 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대승경전에서 허공속의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객관적 세계관에서 주관적 세계관으로
한자경 교수의 꿈의 비유는 매력적이다. 그래서 영상강의를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꿈의 비유는 내려 놓았다. 그것은 세계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세계관에서 주관적 세계관으로 바뀐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계관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계란 어떤 것일까?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 (S35;23)”이라 하였다. 여섯 가지 감역이 일체인 것이다. 또 세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S35:107)
부처님이 말씀 하신 일체와 세상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로 세상이 있어서 그 안에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있어서 그 속에서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 안에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끝을 보기 위하여, 우주의 끝을 보기 위하여 멀리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 라고 말씀 하셨다. 이 몸과 마음을 떠나 달리 세계가 없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 보라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전도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상락아정이다. 가르침에 따라 있는 그대로 보면 아닛짜(무상), 둑카(고), 아낫따(무아)임에도 정반대로 생각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말하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말하고, 완전하지 않은 것을 완전하다고 말한다. 또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모두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은 사념처를 말씀 하셨다. 네 가지 현상, 즉 몸과 느낌과 마음과 사실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괴로움을 소멸하여 궁국적으로 열반을 실현 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사상을 강조한다. 어떤 이는 부파불교의 모순 때문에 대승보살 사상운동이 일어 났다고 한다. 부파불교시대에 중생구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개인수행에만 몰두 하는 풍토 때문에 대승불교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해탈에만 열중하는 아라한 불교를 강력히 비판한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었다. 여래 십호를 보면 가장 먼저 칭명되는 것이 아라한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아라한의 경지까지 이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 과연 중생구제와 무관한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브라흐마 사함빠띠가 여러 번 등장한다. 전도선언이라 일컬어 지는 청원경(S4:5)에도 등장하지만, 제47 상윳따에도 등장한다. 경에서 브라흐마 사함빠띠는 부처님의 사념처에 대한 설법을 듣고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Ekāyanaṃ jātikhayantadassī
maggaṃ pajānāti hitānukampī
Etena maggena atariṃsu pubbe
tarissanti ye ca taranti oghanti.
[하느님]
“태어남을 소멸시켜 그 궁극을 보는 님,
뭇삶에 대한 이익과 애민을 갖춘 님께서는
하나로 통하는 길을 알아 그 길을 따라
거센흐름을 건넜고 건널 것이고 지금도 건너고 있네.(S47:18)
게송을 보면 열반을 실현 하는 삶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보살이 되어 세세생생 윤회하며 허공계가 다할 때 까지 큰 서원을 세워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열반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는 것, 그리고 열반에 듦으로서 보여 주는 것 자체가 중생을 구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세계를 보는 눈이 대승과 다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45년간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하여 전법하였다. 그런 전법활동이 바로 보살사상이고 대승이다. 그리고 열반을 몸소 보여 주셨다. 바로 그것이 중생을 구제한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들도 부처님의 길을 따라 갔다. 부처님의 길을 따라 가는 것 자체가 대승이고 보살정신이다. 누구나 아라한이 되면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을 스스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에서 “뭇삶에 대한 이익과 애민”은 다름 아닌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도 아라한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라한이 출현하지 않았을 때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아난다]
“벗이여,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닦지 않고 익히지 않는다면 정법이 쇠퇴합니다. 그러나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닦고 익히면, 정법은 쇠퇴하지 않습니다. (S47:23)
있는 그대로 현상을 보지 않았을 때 정법은 쇠퇴할 것이라 한다. 따라서 사념처가 있으면 정법이 있고, 사념처가 없으면 정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법이 쇠퇴하면 아라한도 나오지 않고 그에 따라 중생구제도 없게 되는 것이다.
문자주의자, 근본주의자가되어야
사념처가 없는 불교를 정법이라 볼 수 없다. 또 아라한이 출현하지 않은 불교를 정법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대승불교 경전을 보면 공통적으로 사념처가 보이지 않는다. 또 아라한을 부정한다. 그 대신 삼매를 중시하고, 삼매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한다. 그래서 허공속의 부처님과 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꿈속의 나가 꿈꾸는 나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스승이 없는 시대에 불자들은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의지해야 할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말라.(S47:9)” 라 하였다. 이런 유훈에 따르면 불자들이 의지할 것은 빠알리니까야 뿐이다.
불자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해야 한다.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기 때문에 상락아정과 같은 전도된 인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철저하게 문자주의자, 근본주의자가되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근본주의는 위험한 것이지만 불교에서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는 이야기는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SF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 그리고 오물장 같은 개인적인 견해는 모두 빠알리니까야를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 본다.
2013-06-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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