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주로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다보면 흔히 듣는 말 중의 하나가 경전을 맹신한다는 비판이다.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주셨다.
“연꽃님 글을 애독하고 있지만 가끔은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있는 것같기도 합니다. 경전은 100% 옳지는 않습니다.”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지 충고의 글이다. 더구나 빠알리 니까야가 100%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녹음해 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빠알리 니까야를 100% 확신하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단어하나, 문구 하나, 문장 하나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경전적 도그마에 빠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학자들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다. 2011년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의 초안을 주도 하였던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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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최초 경전 편찬은 문자의 영향, 조성택교수, 법보신문,2009-09-30)
대체로 학자들은 경전 전승과정에 의문을 표현한다. 학자로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나 경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교수는 21세기에 맞는 대승경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깟사빠존자는 “담마 아닌 것이 득세 하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라고 하여 결집을 주도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대중들이 합송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빠알리 니까야가 성립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담마 아닌 것이 섞여 들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로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문자로 보전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전승과정에서 편집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이 니까야 저 니까야에 부처님의 말씀이 종횡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담마 아닌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짜여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빠알리 니까야 실려 있는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 열반후에 500명의 아라한이 합송한 것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부터 이미 제자들에게 암송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에 남아 있는 ‘사띠’의 뜻이라 볼 수 있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녹음기도 없었고 필기구도 없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이를 되새겨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수행방법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45년 동안 부처님 재세시 제자들은 끊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되새기고 사유하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좋은 예가 숫따니빠따의 제4장(Aṭṭhaka Vagga)과 5장(Pārāyana Vagga)을 주석한 닛데사(Niddesa)를 들 수 있다.
닛데사는 부처님의 상수제자이자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 존자가 주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처님 재세시 폭 넓게 암송 되어 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이전에 이미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되새기고 사유하고 암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대에 편집되거나 조작 되었을 것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늘날 한국에서 불자들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불교가 근본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알리 니꺄야 원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단어 하나, 구문 하나, 문장 하나에 이르기 까지 원문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여기에 다른 해석이 달라 붙으면 안된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경전적 도그마라고 해도 상관 없다. 왜냐하면 경전에 의존하면 할수록 부처님의 원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원음을 멀리 함으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되어 왔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각종 비불교적 행위나 사상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서 멀어진 결과이다. 따라서 불교근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들이지만, 불교근본주의자들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 충실하기 때문에 가장 평화로운 자들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빠알리 니까야가 번역되어 많이 읽혀지고 있는 시대에 니까야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별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전승과정에서 다른 사상이 혼입 되었다든가, 편집자의 생각이 실렸다든가 하여 100% 부처님의 원음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자신의 깜냥으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내용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의론자들의 말대로라면 니까야에서 이것 저것 다 빼고 나면 수행과 관련된 몇 개의 경만 남는다. 또 회의론자들이 늘 하는 말이 “부처님은 현세의 가르침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였지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윤회와 업에 대하여 서슴없이 부정하는 발언을 쏟아 내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물론적 단멸론자들이다.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경전을 신뢰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적 근거 없이 남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 모두가 빠알리 니까야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2015-06-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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