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공덕 여덟 가지와 비교된 가르침과 계율
바다를 접하면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저 멀리 바다 끝까지, 저 멀리 하늘 끝까지 쳐다 보면 두 개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이 수평선이다. 이런 수평선은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잘 사는 나라이든, 원시부족이 사는 나라이든 바다 그 자체는 모두 똑 같다. 그래서 바다는 평등하다.
바다의 보편적 특징
초기경전에 바다와 관련된 내용이 종종 보인다. 그 중에서도 여덟 가지 바다의 특징에 대하여 기술해 놓은 경이 있다. 그 여덟 가지는 전세계 바다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경전에 기술 되어 있는 여덟 가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커다란 바다는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점처적으로 깊어지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는다.
둘째, 커다란 바다는 안정되어 있어 해안을 침범하지 않는다.
셋째, 커다란 바다는 죽은 사체와 함께 지내지 않기 때문에, 커다란 바다에 죽은 사체가 생기면 그것을 신속하게 해안으로 옮겨서 육지에 올려 놓는다.
넷째, 어떠한 강이든 겐지스, 야무나, 아찌라바띠, 싸라부, 마히 강과 같은 커다란 강이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각각의 이름을 버리고 커다란 바다라 불린다.
다섯째, 커다란 바다에 세상의 모든 하천이 흘러 들고 하늘의 비가 쏟아져도 그 때문에 커다란 바다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여섯째, 커다란 바다는 오직 한 맛인 짠 맛을 지니고 있다.
일곱째, 커다란 바다에는 많은 보물 다양한 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보물로서 진주, 보석, 수정, 묘안석, 소라, 석영, 산호, 은, 금, 루비, 에메랄드가 있다.
여덟째, 커다란 바다에는 커다란 존재들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커다란 존재로 거대어, 바다괴어, 바다괴물, 아수라, 용, 건달바가 살고 있고 그 키가 일백 요자나의 존재, 이백 요자나의 존재, 삼백 요자나의 존재, 사백 요자나의 존재, 오백 요자나의 존재가 살고 있다.
이상 여덟 가지 바다의 특징에 대한 것은 앙굿따라니까야 ‘빠하라다의 경(A8.19)’과 우다나 ‘포살의 경(Uposathasutta, Ud.51)’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우다나에서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포살에 대한 것이다.
초야, 중야, 후야
한때 부처님이 사왓티에서 뿝바라마 승원의 미가라마뚜 강당에 계셨다. 여기서 미가라마뚜(migāramātu)는 재가여신도 비싸카(visākhā)의 이름으로 그녀가 세우고 기증한 것이다. 한자어로 녹자모(鹿子母)라 한다.
이때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밤이 깊어 초야가 지났습니다.”라고 말하며 수행승들에게 계율의 항목을 설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침묵하였다. 중야가 지나도, 후야가 지나도 부처님은 침묵하였다. 여기서 초야, 중야, 후야라 하면 어느 정도 시간일까?
부처님의 하루 일과가 있다. 부처님도 하루 일과를 끝나면 잠에 들었다. 초야라 하면 오후 6시에서 밤 10시를 말한다. 중야는 밤 10시에서 새벽 2시, 후야는 새벽2시에서 새벽 6시까지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후야에서 잠에 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새벽 3시에서 4시에 마음새김을 하며 취침에 들었다고 전한다.
“대중이 청정하지 못하다”
후야라 하면 새벽 2시에서 6시 사이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때 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결과 모든 수행승들이 잠에 들지 못하고 부처님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어떤 불편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일까? 대체 어떤 일이 일어 났길레 부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을까? 초기경에서 좀처럼 이런 장면을 볼 수 없다.
부처님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대중이 청정하지 못하다.(aparisuddhā Ānanda parisā, Ud.51)”라고 하였다. 이때 신통제일 목갈라나는 “어떤 사람과 관련하여 대중이 청정하지 못하다고 말씀 하신 것일까?"라며 자신의 마음속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읽어 내려 갔다. 이로 보았을 때 아무리 신통제일 목갈라나라 하지만 부처님 마음만은 못 읽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목갈라나는 마침내 청정하지 못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탐욕으로 가득차고 쓰레기로 오염된 사람을 보았다. (Ud.51)”라고 되어 있다. 수행자도 아니면서 수행자인척 하며 대중속에 앉아 있는 의심스런 사람을 본 것이다.
이에 목갈라나는 다가가서 “벗이여, 일어나라, 세존께서 보셨다. 그대는 수행승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 (Ud.51)”라 하였다. 하지만 세 번 말했음에도 그 수행승은 침묵하였다. 이때 침묵은 저항의 표시라 볼 수 있다.
“팔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내고”
세 번의 퇴장 명령에도 불응하였을 때 어떻게 하였을까? 놀랍게도 초기경에서는 “그러자 존자 마하 목갈라나는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내고 빗장을 잠그고 세존께 계신 곳을 찾아 갔다. (Atha kho āyasmā Mahāmoggallāno taṃ puggalaṃ bāhāyaṃ gahetvā bahidvārakoṭṭhakā nikkhāmetvā sūcighaṭikaṃ datv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d.51)”라고 되어 있다.
강제로 끌어 낸 것이다. 이런 사실은 다른 경전에서 볼 수 없다. 우다나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실을 경에 언급하였을까? 이는 바다의 특징 여덟 가지를 계율과 관련지어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교훈적 계율의 항목(ovadapātimokkha)
포살 중에 오염된 수행은 끌려 나갔다. 이에 목갈라나는 “대중은 청정해졌습니다.”라고 부처님에게 보고 하였다. 부처님이 직접 지시 하지 않았지만 목갈라나가 신통으로 오염된 사람을 찾아 내어 퇴장 시킨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지금부터 포살에 참여하거나 계율의 항목을 외우지 않겠다. 수행승들이여, 지금부터 그대들이 포살에 참여 하거나 계행의 항목을 외우도록 해라. 수행승들이여, 여래가 청정하지 못한 사람과 포살에 참여 하거나 계행의 항목을 외우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경우도 아니다.”
(Uposathasutta -포살의 경, 우다나 Ud.51, 전재성님역)
주석에 따르면 계율의 항목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의무적 계율의 항목(āṇāpātimokkha)’이고, 또 하나는 ‘교훈적 계율의 항목(ovadapātimokkha)’이다.
의무적 계율의 항목은 150가지 의무계율을 말한다. 이는 제자들이 ‘세존이시여, 들의십시오.’라고 시작하고 독송하는 것이다. 교훈적 계율항목은 부처님이 독송하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교훈적 계율항목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것일까? 첫째는 법구경 184번 게송으로 “참아내고 인내하는 것이 최상의 고행이며 열반은 궁극이다. 출가자는 남을 해치지 않고 수행자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Dhp184)”라는 내용이다.
두번째는 법구경 183번 게송으로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3)”라는 내용이다.
세번째는 법구경 185번 게송으로 “비방을 삼가고 해치지 않고 계행의 덕목을 지키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홀로 떨어져 앉거나 눕고 보다 높은 마음에 전념하는 것, 이것이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5)”라는 내용이다. 이 세가지 항목에 대하여 부처님이 독송한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이 세가지 항목은 제자들도 7년이 지나면 독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20년간 이 세 항목을 독송하였지만 경에서처럼 위험을 감지 하고 그 이후에는 독송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험이란 청정하지 못한 자, 오염된 자가 앉아 있을 때는 교훈적 항목 세 가지를 독송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법구경 183번, 184번, 185번 게송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적으로 독송한 계율임을 알 수 있다.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
퇴장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우다나에서 볼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볼 수 없다. 포살과 관련하여 퇴장 사건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가르침과 계율에 대하여 바다의 공덕 여덟 가지를 비교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 가르침과 계율을 좋아 하는 여덟 가지 아주 놀랍고도 경이로운 이유가 있다.”라며 바다의 공덕 여덟 가지를 가르침과 계율로 비교 하여 설명한 것이다. 먼저 첫번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는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점차적으로 깊어지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
(Ud.51,A8.19)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다. 근래 한국불교에서 ‘돈오돈수’라 하여 갑작스런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여 왔다. 이는 돈점논쟁이라 하여 이전의 돈오점수에 대하여 성철스님이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명하게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nāyatakeneva aññāpaṭivedho)”고 하였다. 이를 바다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오염된 자가 있으면
바다의 공덕 세번째는 ‘커다란 바다는 죽은 사체와 함께 지내지 않기 때문에, 커다란 바다에 죽은 사체가 생기면 그것을 신속하게 해안으로 옮겨서 육지에 올려 놓는다.’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바다의 특징은 우다나 포살의 경에서 어느 청정하지 못한 수행승의 퇴장 사건과 관련이 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설명이 없지만 우다나에서는 충분한 설명이 있어서 왜 두번째 바다의 특징이 오염된 수행승이 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커다란 바다는 죽은 사체와 함께 지내지 않기 때문에, 커다란 바다에 죽은 사체가 생기면 그것을 신속하게 해안으로 옮겨서 육지에 올려 놓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하고 순수하지 못하고 의심스런 행동을 하고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 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탐욕으로 가득 차고 쓰레기로 오염되었는데,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참모임은 그와 함께 살지 않으며, 즉시 모여서 그를 쫓아내며, 그가 수행승의 참모임에 앉아 있더라도, 그는 참모임과 멀어져 있고 참모임도 그와 멀어져 있다.”
(Ud.51,A8.19)
부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다. 참모임(승가)에 오염된 자가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자가 있으면 쫓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가르침을 멀리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를 쫓아 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주 볼 수 없다. 더구나 강제로 퇴장조치 하는 장면 역시 희유하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승가는 청정함을 생명으로 하고 있음을 말한다. 조금이라도 오염된 자가 있으면 승가 전체를 타락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표로 정리하면
부처님은 바다공덕 여덟 가지 사항에 대하여 가르침과 계율에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No |
바다 공덕 8가지 |
가르침과 계율 |
1 |
바다는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점처적으로 깊어지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는다. |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 |
2 |
바다는 안정되어 있어 해안을 침범하지 않는다. |
내가 제자들을 위해 시설한 학습계율을 나의 제자들은 생계를 위해 침범하지 않는다. |
3 |
바다는 죽은 사체와 함께 지내지 않기 때문에, 커다란 바다에 죽은 사체가 생기면 그것을 신속하게 해안으로 옮겨서 육지에 올려 놓는다. |
어떤 사람이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하고 순수하지 못하고 의심스런 행동을 하고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 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탐욕으로 가득 차고 쓰레기로 오염되었는데,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참모임은 그와 함께 살지 않으며, 즉시 모여서 그를 쫓아내며, 그가 수행승의 참모임에 앉아 있더라도, 그는 참모임과 멀어져 있고 참모임도 그와 멀어져 있다. |
4 |
어떠한 강이든 겐지스, 야무나, 아찌라바띠, 싸라부, 마히 강과 같은 커다란 강이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각각의 이름을 버리고 커다란 바다라 불린다. |
어떠한 네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든 즉, 왕족, 바라문, 평민, 노예이든,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예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
5 |
바다에 세상의 모든 하천이 흘러 들고 하늘의 비가 쏟아져도 그 때문에 커다란 바다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
많은 수행승들이 잔여가 없는 열반의 세계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지만, 열반의 세계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
6 |
바다는 오직 한 맛인 짠 맛을 지니고 있다. |
이 가르침과 계율은 유일한 맛인 해탈의 맛을 지니고 있다. |
7 |
바다에는 많은 보물 다양한 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보물로서 진주, 보석, 수정, 묘안석, 소라, 석영, 산호, 은, 금, 루비, 에메랄드가 있다. |
이 가르침과 계율에도 많은 보물 다양한 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보물로서 네 가지 새김의 토대, 네 가지 올바른 노력, 네 가지 신통의 기초, 다섯 가지 능력, 다섯 가지 힘, 일곱 가지 깨달음고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다. |
8 |
바다에는 커다란 존재들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커다란 존재로 거대어, 바다괴어, 바다괴물, 아수라, 용, 건달바가 살고 있고 그 키가 일백 요자나의 존재, 이백 요자나의 존재, 삼백 요자나의 존재, 사백 요자나의 존재, 오백 요자나의 존재가 살고 있다. |
이 가르침과 계율에도 커다란 존재들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커다란 존재로 흐름에 든 님, 흐름에 든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흐름에 듦의 길로 가는 님, 한번 돌아 오는 님, 돌아 오지 않는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돌아오지 않음의 길을 가는 님, 거룩한 님,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거룩한 길을 가는 님이 살고 있다. |
불사(不死)의 문
표에서 5번째 항목 “열반의 세계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우주기를 부처님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한 뭇삶도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때에도 열반의 세계는 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부처님이 계실 때에 각각의 만남에서 무수한 뭇삶들이 불사를 얻었더라도 그 때에 열반의 세계는 가득찼다고 볼 수 없다.(UdA.303)”라 설명 되어 있다.
주석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우주기를 부처님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한 뭇삶도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지 못한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법이 살아 있어야 열반을 실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만약 정법이 변질되어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열반의 문도 닫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삼계와 육도를 윤회 하게 될 것이다.
부처가 출현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열반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 열반의 문은 다름 아닌 불사(不死)의 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면 오온의 죽음으로 인하여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게 되면 불사를 얻게 된다. 왜 그런가? 자아에 취착된 오온의 짐을 모두 내려 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아의 범부는 오온의 죽음으로 죽음을 맞이 하지만, 무아의 아라한은 오온의 죽음으로 불사를 얻게 된다.
해탈의 맛이란?
표에서 6번째 항을 보면 “유일한 맛인 해탈의 맛을 지니고 있다.”라 하였다. 이는 바다가 유일하게 짠맛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한 것이다. 그런 해탈의 맛은 어떤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우파니사드를 이용하여 범아일여의 체험을 바다에서 소금이 용해 되는 것에 비유하였다. 주석에서는 “오염에서 벗어난 맛, 일체의 가르침을 성취하여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한 것을 뜻한다. (UdA.303)”라 하였다.
경에서는 해탈의 맛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해탈의 맛은 ‘vimuttirasa’를 말한다. 바다에 짠맛이 있듯이 해탈에도 해탈의 맛이 있는 것이다. 그런 해탈의 맛은 어떤 것일까? 해탈을 뜻하는 위뭇띠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마음의 해탈(ceto-vimutti)이고 또 하나는 지혜의 해탈(paññā-vimutti)이다. 사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Deliverance of mind', in the highest sense, is that kind of concentration (samādhi) which is bound up with the path of Arahatship (Arahatta-magga); 'deliverance through wisdom' is the knowledge (ñāṇa) bound up with the fruition of Arahatship (Arahatta-phala). Cf. A. V, 142.
(vimutti, 빠알리사전 PCED194)
사전에 따르면 마음에 의한 해탈은 아라한도(Arahatta-magga)에 이르기 위하여 마음이 집중된 상태를 말한다. 가장 높은 의식으로서 마음의 해방(Deliverance of mind)이라 한다. 지혜에 의한 해탈은 아라한과(Arahatta-phala)에 이르기 위한 앎으로서 통찰을 통한 해방(deliverance through wisdom)’ 으로 보고 있다.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바다와 관련하여 가르침과 계율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 우다나와 앙굿따라에 있다. 그러나 초반 도입부와 마무리 하는 부분이 다르다. 앙굿따라니까에 없는 것이 우다나에 있는 것이다. 우다나 후반부에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부처님 게송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vivaṭaṃ nātivassati,
Tasmā channaṃ vivaretha
evaṃ taṃ nātivassatī
[세존]
“덮인 것에 비가 젖고
열린 것에 비가 젖지 않는다.
그러므로 덮인 것을 열어라.
그러면 비에 젖지 않을 것이다.” (Ud.51)
“덮인 것에 비가 젖는다.(Channam-ativivassati)” 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죄악을 저지르고 감추면 거기서 다른 것, 거기서 다른 것 하면서 새로운 죄악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죄악의 비, 오염의 비가 넘치게 내린다. (UdA.306)”라 하였다.
“열린 것에 비가 젖지 않는다.(vivaṭaṃ nātivassati)”라 하였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주석에 의하면 “죄악을 저지르고 감추지 않고 열어서 도반들에게 밝히면, 법답게 대처하여 설명하여 복귀시켜주므로 다른 죄악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린 것에 죄악의 비, 오염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UdA.306)”라 하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절 “그러므로 덮인 것을 열어라. 그러면 비에 젖지 않을 것이다. (Tasmā channaṃ vivaretha evaṃ taṃ nātivassatī)”가 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죄악을 저질렀어도 참회 하는 자에게 오염의 비가 그의 존재를 꿰뚫고 극단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오염 때문에 젖지 않고 계행이 청정하고 통찰을 확립하여 이해하는 것에 따라 점차적으로 열반을 얻게 된다. (UdA.306)”라고 설명 되어 있다.
2015-09-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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