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는 한국승복 입은 분들은 이교도입니다”테라와다불교와 조사불교
한국에도 테라와다불교가 있습니다. 한국에 테라와다 교단이 성립된지 8년이 되었습니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 테라와다 교단이 성립되었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테라와다불교와 한국불교의 차이는 겉으로는 승복으로 구분됩니다. 빨간색 계통의 테라와다승려와 가사장삼을 입은 회색승복의 한국승려로 구별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소의경전에서 차이가 납니다. 테라와다에서는 부처님당시로부터 전승되어온 빠알리 삼장을 근거로 하지만, 대승불교와 선불교가 혼합된 한국불교에서는 대승경전과 선어록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파욱사야도와 고우스님의 태화산논쟁
몇 해전 미얀마 파욱사야도와 고우스님과의 대담이 있었습니다. 2011년 마곡사 인근 조계종 전통불교문화원에서 열린 ‘태화산논쟁’입니다. 어떤 이는 ‘법거량’이라고도 했습니다. 테라와다의 고승과 한국선불교의 고승이 깨달음을 주제로 하여 4시간 동안 토론한것입니다.
파욱사야도와 고우선사의 태화산논쟁
사진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61
토론에서 고우스님은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럿 있듯이 간화선이나 위빠사나나 깨달음을 이루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길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파욱사야도는 간화선의 돈오를 부정하며 점진적인 닦음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파욱사야도는 개구리가 깡총 뛰는 것처럼 깨달음을 한번에 이룰 수 없고 깨달음은 점진적이고 지속적 수행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수행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돈오점수
고우스님은 돈오돈수를 이야기 했고 파욱사야도는 돈오점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돈오돈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돈오점수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는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점차적으로 기울고 점차적으로 깊어지고 갑자기 절벽을 이루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는 사실이 이 가르침과 계율을 볼 때마다 수행승들이 이 가르침과 계율을 좋아하는 첫 번째 아주 놀랍고 경이로운 이유이다.”(Ud.51,A8.19, 전재성님역)
이 가르침은 우다나 ‘포살의 경(Ud.51)’과 앙굿따라니까야 ‘빠하다라의 경(A8.19)’과 병행합니다. 부처님이 포살일에 여덟 가지 포살덕목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여덟 가지 바다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비유 첫 번째가 점차적이고 점진적은 기울임이듯이, 가르침과 계율 역시 점진적임을 말합니다.
가르침과 계율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돈오돈수라 하여 마치 개구리가 깡총 뛰는 것처럼 단번에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계율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계행은 오랜 세월 지켜야 합니다. 부처님은 학습계율이라 하여 설령 아라한이라 하여도 평생 배우고 지켜야 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깨달음 지상주의 인듯 합니다. 깨닫기만 하면 계율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분명히 가르침과 계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견도, 수행도, 무학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돈오점수입니다. 급작스럽게 앎이 있더라도 점진적으로 닦아 나가야 함을 말합니다. 명상중에 고요함을 맛 보아 마음이 지극히 청정해져 있더라도 마음의 오염원이 뿌리 뽑히지 않았을 때 다시 예전처럼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향사과에 대하여 견도, 수행도, 무학도로 설명합니다. 궁극적 진리를 맛본 수다원에게는 남아 있는 번뇌가 있습니다.
수다원은 단지 진리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견도(見道)’라 합니다. 견도 이후에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를 수행도(修行道)라 하는데 사향사과에서 사다함과 아나함이 이에 해당됩니다. 남아 있는 오염원이 완전히 제거 되었을 때 무학도(無學道)가 됩니다. 아라한이 되어야만 돈오돈수가 됩니다. 그 이전에는 돈오돈수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선불교에서 돈오돈수를 주장한다면 이는 아라한에 해당될 것입니다.
행한 것에 덧붙여 할 일도 없다
아라한을 무학도라 합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무학도이고,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 수행의 완성자라 합니다. 테라가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Tassa sammā vimuttassa,
santacittassa bhikkhuno;
Katassa paṭicayo natthi,
karaṇīyaṃ na vijjati.
“올바로 마음이 해탈되어
적멸에 든 수행승에게는
행한 것에 덧붙여 할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Thag.642)
번뇌를 부순 수행승은 ‘행한 것에 덧붙여 할 일도 없다(Katassa paṭicayo natthi)’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든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든 쌓을 것이 없다.”(ThagA.II.271) 는 뜻입니다. 선업도 악업도 쌓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행위를 하되 업을 짓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작용심(kiriyacitta)’이라 합니다. 마치 허공을 나는 새처럼, 행을 하긴 하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그렇네” “그렇구나” “그러려니”합니다. 단지 원인없이 작용만 하는 마음이 있어서 업이 되지 않습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짓지 않으면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명색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형성되는데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으니 세상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아라한선언을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번뇌가 많은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는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견도에 이어 수행도를 거쳐 마침내 무학도가 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해탈에 이어 해탈지견이 생겨난 것입니다. 무학도의 아라한에게는 해야 할일을 해 마쳤기 때문에 해야 할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도 없다.(karaṇīyaṃ na vijjati)”라 했습니다.
진짜 돈오돈수를 이루었다면
아라한이 되면 번뇌가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돈오돈수라 하여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욕심내고 화를 낸다면 돈오돈수라 볼 수 없습니다. 자아개념이 남아 있는 한 성자의 흐름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동아시아불교에서 계행도 지키지 않는 자가 개구리가 깡총 뛰듯이 견성을 했다고 하지만 계행이 뒷받침 되어 있지 않으면 성자의 흐름에도 들어 가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동아시아불교의 돈오돈수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짜 돈오돈수를 이루었다면 이전생에 수행한 과보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파욱사야도는 “만약 ‘돈오’를 이룬다면 이것은 십만겁을 수행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생에 단번에 아라한이 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만일 누구나 단번에 깨달음을 이룬다면 계행을 지킬 필요도 없고 번뇌의 소멸과정을 거칠 기간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동아시아불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불교와 테라와다불교는 서로 다른 종교
고우스님과 파욱사야도의 대담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행의 전통에 대한 것입니다. 고우스님은 간화선행자가 위빠사나로 전향하는 것에 대하여 게의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기때문에 위빠사나도 그 중의 하나의 길이라고 본 것입니다. 어느 길로 가든지 정상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이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입니다. 정상은 하나인데 가는 길이 여럿 이라 합니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깨달음이나 타종교에서 말하는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는 같은 것이라 합니다. 어느 종교다원주의자에 따르면 표현 방법만 다를 뿐 사실 같은 것이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힌두교의 브라만, 중국의 상제, 대승불교의 바이로차나 등 인격신의 이름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것으로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라 합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나 참나도 같은 범주로 보고 있습니다.
고우스님은 파욱사야도와의 대담에서 정상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럿인데 위빠사나도 그런 길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파욱사야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관찰하여 모든 오염원을 소멸시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의 경지가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불교와 테라와다불교는 180도 다른 것입니다. 아니 서로 다른 종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국에는 한국승복 입은 분들은 이교도입니다”
고우스님과 파욱사야도의 태화산대담을 보면 서로 다른 불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니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한 토론 같습니다. 이는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유튜브법문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일부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님도 처음에 태국가서 수행할 때, 그때는 한국승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비구계를 받기 전이니까. 태국에는 한국승복 입은 분들은 이교도입니다. 스님취급을 안해줘요. 일반재가자들은 바로 출가를 시켜 주는데, 이교도는 규정상 4계월동안 거시서 열심히 수행하고 생활을 해야만이 계를 주게끔 되어 있어요. 일반인들 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게 되요. 밥 먹을 때도 저 밑에 사미승밑에 가 있어야 해요. 스님들 밑에 앉아 수행하는데 불뚝 성질이 나요. ‘내가 니들하고 붙어 못할게 뭐 있노?’그 더운 나라에서 장삼까지 입고 앉아 갔고 한시간 동안 내내 앉아 있는 거에요. 다른 스님들 한시간 못앉아 있어요. 이 승복 입은 테라와다 스님들. 일어나고 가버리고 수행을 하는지 안하는지 그것도 모르겠고. 어떨 때는 불뚝 성질이 일어나니까 ‘내가 한국인이고 무얼 보여 주어야겠다’, 그러다보니까 어떨 때는 하루종일 앉아 있기도 하고. ” (빤냐와로 삼장법사, 20150130법문)
빤냐와로(진용)삼장법사는 젊어서 태국에서 출가했습니다. 태국에서 계를 받은 한국계 테라와다스님입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창립에 기여한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빤냐와로삼장법사는 태국에 갔었을 때 한국스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승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이교도 취급당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테라와다 사미보다 못한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일반인 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습니다. 별도로 수습기간 4계월이 필요한 것은 이교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교도가 불교에 입문하려면
한국스님이 미얀마나 태국 등 남방 테라와다 불교국가로 수행하러 가면 차별받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동아시아불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아시아불교 스님들을 ‘이교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파욱사야도는 이교도와 토론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교도가 불교에 입문하려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것은 4계월간의 수습기간입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이교도와 토론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대게 이교도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귀의하게 됩니다. 맛지마니까야 ‘밧차곳따의 큰 경(M73)’에 따르면 이교도 밧차곳따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받아 “저는 세존이신 고따마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기 원합니다.”(M73)라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곧바로 구족계를 주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이교도 밧차곳따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밧차여, 예전에 이교도였던 사람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기 원하면, 그는 넉 달 동안 시험 삼아 머물러야 합니다. 넉 달이 지나 수행승들이 그에게 만족하면, 그들은 그에게 출가를 허락하고 수행승임을 인정하는 구족계를 줍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에서 개인간의 차별을 인정합니다.”(M73, 전재성님역)
이교도에게 4달 간의 유예기간을 주는 것은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또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입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한국스님들을 차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사상의 세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는 부처님이 깨닫고 난 다음 전법하려 할 때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S6.1)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신앙을 가진 자가 불교에 입문했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의 신앙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 없이 “먼저 믿어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사상체계나 믿음을 먼저 내려 놓고 그 다음에 새로운 사상이나 믿음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장 먼저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절에 가면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알음알이를 깨끗이 비워내라는 것이다 . 그래서 다시 시작 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일 것을 말합니다. 초기경전에서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에서 유래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교도 밧차곳따에게 4개월간의 수습기간을 주었습니다. 한철 동안 빅쿠들과 살아 보아서 빅쿠들이 판단했을 때 받아 들여도 좋다고 모두 동의한다면 행자승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만일 사상의 물이 덜 빠졌다면 받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빤냐와로삼장법사가 태국에 한국승복을 입고 갔지만 이교도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테라와도에서 동아시아불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동아시아불교는 조교(祖敎)
사실 동아시아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조교(祖敎)라 볼 수 있습니다. 선불교 선사들은 조사어록에 근거하여 수행합니다. 거의 대부분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법문한다거나 수행하지 않습니다. 육조단경이나 수 많은 조사의 선어록에 따라 공부하기 때문에 조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조사불교, 즉 조교라고도 합니다.
“오랜 세월 속아 살고 기만당하고 현혹된 것입니다.”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몰랐다던 것을 많이 알게 됩니다. 만일 대승경전만 믿고 있었다면 한국불교가 가장 수승한 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글로벌시대에, 그것도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호국불교에 대한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호국불교라는 말은 없습니다. ‘살생유택’이라 하여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전사의 경(S42.3)’에 따르면 전쟁하다 죽으면 모두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들이 간다는 전사자의 하늘이 아니라 모두 지옥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살생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조국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도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살생유택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했더라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전쟁터에서 상대방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가진채 죽게 되면 그 분노의 마음으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촌장은 땅을 치고 통곡하듯이 “오랜 세월 속아 살고 기만당하고 현혹된 것입니다.”(S42.3)라 했습니다.
신도들이 무지하면 성직자의 권위는 올라갑니다.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많이 아는 것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중세시대 카톨릭에서는 신부들이 라틴어로 예배를 보았습니다. 바이블도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일반사람들은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동아시아불교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암호문처럼 보이는 한문경전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초기불교시대입니다. 초기경전이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몰랐던 것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말씀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쟁하다 죽으면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는 가르침을 듣고서 분개한 촌장처럼, 불자들은 초기경전을 접하고 나서 “오랜 세월 속아 살고 기만당하고 현혹된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판단 기준은 가르침
모르면 속고 살게 됩니다. 알게 되면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불교는 불교라 볼 수 없습니다.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조사불교, 조교가 됩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깨달은 자라 하며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판단 기준은 가르침입니다. 마치 법을 어겼을 때 법전을 열어 보듯이, 가르침에 어긋나는지 알아 보려면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됩니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의 가르침이라면 경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을 말한다면 이교도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2017-05-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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