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숫따니빠따(Suttanipāta)/숫따니빠따 독송

Sn4:13 큰 전열의 경(Mahāviyūhasutta) : 성자는 짐을 내려놓아 완전히 해탈한다. 그는 분별ㆍ싫어함ㆍ구하는 바가 없다.

moksha 2016. 10. 31. 23:33


Sn4:13 큰 전열의 경(Mahāviyūhasutta)

 

895. [질문자] “누구든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면서,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모두 비난을 받습니까? 또는 그 때문에 칭찬을 받습니까?”

 

896. [세존] “그것은 보잘 것 없어 평안의 가치가 없으니, 그 논쟁의 결과는 단지 그 두 가지1라고 나는 말합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논쟁이 없는 경지가 안온하다고 알아서 논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897. 일반 사람들이 갖는 세속적인 것이 어떠한 것이든, 현명한 사람은 그 모든 것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환호하지 않아 집착하는 일이 없는데, 무엇을 집착할 것입니까?

 

898. 규범을 최상으로 삼아 자제하면, 청정해진다고 말하며, 스스로 금계를 세워 거기에 집착하는, 소위 현명하다고 하는 자들은 ‘이것만을 공부하자. 그러면 아마도 청정해질 것이다.’라고 존재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899. 그러나 그들은 규범이나 금계를 어겨서 일에 실패하면, 크게 동요합니다. 카라반을 잃고 집을 떠난 자처럼, ‘여기에 청정이 있으리라.’고 열망하고 갈망합니다.

 

900. 규범이나 금계도 여의고, 죄악이 있든 없든 이 모든 행위를 버리고, 청정이나 부정도 구하는 바도 없이, 적멸을 수호하며, 욕망을 여의고 유행하십시오.

 

901. 혐오스러운 고행에 의존하거나 혹은 보고 듣고 인식한 것에 의존하여,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들은 날아오름에 의해2 청정을 부르짖습니다.

 

902. 참으로 구하는 바가 있다면 욕망하고, 도모하는 바가 있을 때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는 사람,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느 곳을 바랄 것입니까?”

 

903. [질문자] “어떤 사람들은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천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 모두가 현명한 사람들이라 불리는데,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참다운 주장입니까?”

 

904. [세존] “자기의 가르침을 완전하다 말하고, 그러나 남의 가르침은 천박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다투며 논쟁합니다. 저마다 자기 의견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905. 남에게 비난받고 있기 때문에 천박하다면, 가르침 가운데 어떠한 것도 탁월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고, 남의 가르침은 저열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906. 그러나 자기가 걸어가는 길을 스스로 칭찬하듯, 그들은 자기의 가르침을 기립니다. 그들에게 각자의 이론이 청정하기 때문에, 모든 이론이 진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907. 거룩한 님들에게는 남들에 의해 이끌려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가르침들에 독단적으로 집착하는 것도 없고, 남의 가르침을 특별하다고 보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논쟁들을 초월해 있습니다.

 

908.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안다. 나는 본다. 이것은 이렇다.’라고 견해를 통한 청정에 빠집니다. 비록 그가 보았으나 그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들은 한계를 넘어 다른 수단을 통해 청정을 주장합니다.

 

909. 보는 사람은 명색(정신·신체적 과정)만을 보는 것인데, 보고 나서는 바로 그것들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많든 적든 원하는 대로 보아도 좋지만,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청정해진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910. 참으로 완고한 사람은 이끌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이 지어낸 견해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존하는 것만이 청정하다고 말하는 자는 거기에서 진리를 보았고 그것을 통해서 청정해진다고 말합니다.

 

911. 거룩한 님은 성찰하여 허구에 이르지 않습니다. 견해에 흐르지 않고 지식에도 묶이지 않습니다. 범속한 세속적인 진리가 알려지면, 다른 사람은 그것에 집착하지만, 그는 그것을 벗어나 평정을 누립니다.

 

912.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결박을 풀고,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한 쪽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만, 그는 불안한 자들 가운데서도 고요하며, 평정을 누립니다.

 

913. 지나간 번뇌는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으며, 욕망을 추구하지도 않고 독단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현명한 님은 모든 견해를 벗어나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자신을 꾸짖는 일도 없습니다.

 

914. 그는 보고 듣고 인식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도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성자는 짐을 내려놓아 완전히 해탈했습니다. 그는 분별이 없고, 싫어함이 없고, 구하는 바가 없습니다.”


큰 전열의 경이 끝났다.


  1. 두 가지 : 비난과 칭찬, 승리와 패배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날아오름에 의해 : Prj Ⅱ 558에 따르면 ‘무작론(無作論)에 의한 비상(飛翔)’을 말한다. 붓다고싸가 주석에서 말하는 무작론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계급 출신이며 도덕부정론자인 깟싸빠의 주장을 말한다. 깟싸바는 비결정론자로서 일상적 의미의 우연론이 아니라 불교적인 연기사상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우연론으로서 무인론(無因論)을 주장했다. 모든 원인과 결과는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이고 완전히 우연적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무법칙적으로 변화하므로 인관관계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으며, 인과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단멸론(斷滅論)에 속한다. 따라서 인간 행위에 있어서도 도덕적 책임감은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이 깟싸빠가 윤리적인 삶을 부정하는 무작설이라고 불리우는 견해를 갖게 된 이유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