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은 희망의 메시지, 정평불 5월법회
평온한 일요일 오전입니다. 언제 그랬느냐는듯 낡씨는 맑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장마철도 아닌데 5월 중에 내리는 봄비로 인하여 우중충한 하루가 되었습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날씨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면 외출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에서 안락하게 보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날씨는 중요한 변수는 아닙니다.
5월 정평법회에서
5월 정평법회가 불광산사에서 열렸습니다.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개최하는 정기법회입니다. 재가불교신행 단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여법한 법회입니다. 종단 권승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한국불교가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요즘 재가불교단체에서라도 여법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정평법회를 위하여 홍보를 많이 했습니다. 교계신문사이트에 기고 했고, 블로그와 카페, 페이스북 등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기대에 비하여 효과는 미미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사람들의 모임 패턴이 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모임이 토요일 몰려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날씨도 영향 줄 수 있습니다. 비가 온다면 발길을 자제할 것입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왔습니다. 대개 일시적으로 오다 그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새벽부터 자정에 이르기까지 비가 그치지 않았던 때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정평법회가 열리는 날 그리고 서울연등축제의 날에 하루 종일 비가 와서 비가 원망스러울 정도였습니다.
5월 정평법회에는 24명이 참석했습니다. 바뿐 와중에도 참석해 주신 잊지 않고 참석한 분들도 있고 처음으로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어려운 발걸음 했다면 하나라도 건져야 할 것입니다. 처음 오신분들을 위하여 이미우이(Imee Ooi) 음악씨디를 한장씩 선물했습니다.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기쁨이 생겨나는 신비한 음악입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법문만한 것이 없습니다.
목련이 진들
정평불 지도법사 박경준 교수의 5월 법문 주제는 ‘연기법의 오해와 진실’입니다. 박경준 교수는 법문에 앞서 노래를 하나 소개 했습니다. 그것은 ‘목련이 진들’이라는 민중가요입니다. 1980년 5월 광주를 생각하며 선곡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노래의 작사가 그때 당시 중학교 2학년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시를 쓴 사람은 박용주님입니다. 어떻게 중학교 2학년이 이런 시를 지었을까?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련꽃이 한날 목련꽃이 진다해도
무에 그리 그리 슬프랴.
피엇다가 피엇다가 지는 것이
어디 목련꽃 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꽃보다 더 하얗고
순결한 영혼 영혼들이
꽃잎처럼 아프게 떨어진 것을.”
(박문옥 – 목련이진들, 유튜브)
프린트물에 실려 있는 악보 가사를 옮겨 본 것입니다. 시에서 인상적인 구절은 “피었다 지는 것이 어디 목련꽃 뿐이랴.”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목련꽃이 아름답기로 진 목련꽃은 처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1980년 당시 오월 광주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이 목련꽃처럼 떨어졌습니다.
오월의 노래 ‘목련이 진들’의 작곡자는 박문옥님입니다. 박문옥님은 박경준 교수의 친동생입니다. 광주에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 가수입니다. 박용주가 작사하고 박문옥이 작곡한 ‘목련이 진들’ 노래를 배웠습니다. 음악인 조현덕 선생이 유튜브실려 있는 노래(목련이 진들)를 들려 주고 한소절씩 따라 불렀습니다. 나중에는 조현덕 선생 독창으로 부른 것을 들었습니다.
정평법회의 특징은 법문을 시작 하기 전에 노래를 합니다.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노래가 대부분입니다. 지난달 정평법회 때는 범능스님의 ‘먼 산’을 함께 노래 했습니다. 다음달에는 어떤 노래를 선보일지 기대됩니다.
박경준 교수의 ‘연기법의 오해와 진실’
5월 정평법회 주제 연기법의 오해와 진실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프린트물을 준비 했습니다. 자필로 작성된 한페이지 짜리 프린트 물에는 1)붓다의 외도 비판, 2)연기법의 오해, 3)연기법의 제해석 이라는 세 가지 큰 타이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식을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기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연기법을 빼버리면 더 이상 불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교가 연기법이고 연기법이 곧 불교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연기법이 중요한가? 그것은 외도사상을 모두 이 연기법으로 논파 했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부처님당시 소위 육사외도와 바라문의 영원주의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외도사상의 치명적 약점 두 가지
여러 가지 외도사상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를 들라면 신의론, 숙명론, 우연론이라 하는데 이를 소위 삼종외도(三種外道)라 합니다. 신의론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것을 말하며 ‘존우화작론’이라고 합니다. 숙명론은 모든 것을 전생의 업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말하며 ‘숙작인론’이라 합니다. 우연론은 모든 것이 원인없이 이유없이 발생했다고 하여 ‘무인무연론’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삼종외도가 왜 문제일까?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죄악(10악업)의 문제’라 했습니다.
외도사상의 치명적 약점은 죄악에 대한 해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유일신교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가 “이것은 신의 뜻입니다.”라고 신에게 범죄행위를 떠 넘긴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누구도 도덕적 삶을 살 하등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숙명론자가 오계를 어겼을 때 전생의 업보 탓으로 돌린다면 역시 도덕적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외도 사상도 죄악의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오계를 어겨도 모두 외부의 탓으로 돌린다면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만 작용하는 짐승의 세계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실제로 현실의 삶이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짐승처럼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지금 이순간을 즐길 뿐입니다. 이 순간의 행복만을 바라는 자들에게 있어서 창조적 노력은 저 멀리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외도사상은 두 가지 결함, 즉 ‘죄악의 문제’와 ‘창조적 문제’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약점은 앙굿따라니까야 외도의 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의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데,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이와 같이 ‘존자들이여, 그대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더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말한다.
내가 질문하면 그들은 ‘그렇다’라고 동의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거짓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이간질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욕지거리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꾸며 대는 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탐욕스럽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분노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절대자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는 이 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샘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진실로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새김을 잃게 되고 수호를 잃게 되는데, 자신을 수행자라 칭할 타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 수행승들이나 성직자들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논박이다.” (A3.61)
외도사상은 ‘죄악’과 ‘노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오계를 지킬 명분이 없어집니다. 노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수행을 하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됩니다.
연기법으로 모든 외도사상이 논파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소위 삼종외도의 잔재는 불교에도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스님이 법문할 때 모든 것을 ‘전생탓’이라 이야기한다면 숙명론의 잔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설령 알더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두 번째 주제로서 ‘연기법 오해’사례를 소개 했습니다.
연기법 오해 사례
박경준 교수에 따르면 한국불교에서 연기법이 오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연기법을 잘못 이해 하여 본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름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공간적 연기’를 말합니다. 연기법을 ‘공간적 상의성’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본 불교학자 ‘우이 하쿠쥬(宇井伯壽, うい はくじゅ, 1882-1963)’의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연기법을 오해하게 된 배경으로 한문을 들 수 있습니다. 이른바 연기송이라 불리우는 문구에서 이것과 저것을 잘못 해석하여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는 연기, 즉 연기상의설로 본 것입니다. 그 결과 공간에도 적용되어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계연기의 근거가 되었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먼저 연기송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이띠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약유차즉유피 (若有此卽有彼)
약생차즉생피 (若生此卽生彼)
약무차즉무피 (若無此卽無彼)
약멸차즉멸피 (若無此卽滅彼)
when this is present, this comes to be,
when this arises, this arises.
When this is not present, this does not come to be,
when this does not arise, this does not arise.
(연기송 정형문)
연기송은 상윳따니까야 ‘열 가지 힘의 경(S12.21)’ 등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짤막한 게송으로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연기의 가르침을 압축표현한 것입니다. 문제는 중국 한자식 표현입니다.
중국식 한자어 표현을 보면 ‘이것(此)’과 ‘저것(彼)’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 문구를 보면 ‘imasmiṃ’와 ‘ida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이것’의 뜻입니다. 한자어처럼 ‘이것’과 ‘저것’이 아닙니다. 영어해석도 모두 ‘이것’을 뜻하는 ‘this’ ‘this’ 라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경준 교수에 따르면 연기송 빠알리문구 “imasmiṃ sati idaṃ hoti”을 다시 해석하면 “이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게 될 것이다.”라 합니다. 모두 이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사 ‘sati’와 ‘hoti’에 대하여 각각 ‘이다’와 ‘일것이다’라 했습니다. 이는 ‘sati’에 대하여 ‘be’로 보고, ‘hoti’에 대하여 ‘become’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이 정확하다고 합니다.
만일 한문식대로 “약유차즉유피 (若有此卽有彼)”로 표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것과 저것으로 표현 했을 때 ‘그 역도 성립한다’라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라고 성립되면, 정반대로 “저것이 있을 때 이것도 있게 되며”가 될 것입니다. 이는 상호의존 연기의 근거가 됩니다. 연기를 공간적으로 확장하여 화엄교학의 법계연기 토대가 되며 인드라망 이론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는 연기법을 잘못해석한 것이고 연기법을 오해한 것이라 합니다. 빠알리 문구에 따르면 ‘이것’ ‘저것’이라는 말은 없고 모두 ‘이것’ ‘이것’입니다.
연기법을 제대로 해석하면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게 될 것이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라 됩니다. 또 “이것이 생겨날 때 이것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가 됩니다. 이는 영어로 된 해석 “when this is present, this comes to be, when this arises, this arises.”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이다빳짜야따(idappaccayatā)로 설명합니다. 이를 한자어로 차연성(此緣性)이라 합니다. 영어로는 ‘having its foundation on this’라 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연기는 일본불교학자 우이 하쿠쥬가 주장한대로 ‘상호의존성(相依性)’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일본학자의 주장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박경준교수에 따르면 한문식 연기법은 바로 잡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피유고차유(彼有故此有)”, 즉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문식 연기법은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즉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라고 여기서 끝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 역도 성립함을 뜻하는 “피유고차유(彼有故此有)”가 되었을 때 부처님 가르침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됨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열린논단에도 실려 있는 것이라 합니다. 검색해 보니 2009년 9월 불교평론에 ‘[열린논단] 초기불교의 연기상의설 재검토 / 박경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연기법을 한문장으로 표현하면
박경준 교수의 연기법 오해와 진실 세 번째 이야기는 연기법의 제해석에 대한 것입니다. 연기에는 찰나연기, 연박연기, 분위연기 등 다양한 연기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관통하는 적절한 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을 소개 했습니다.
“모든 고통은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일어나므로(緣起)
그 조건과 원인을 제거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緣滅)”
박경준 교수는 한문장으로 압축된 연기법을 ‘연기(緣起)’와 ‘연멸(緣滅)’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풀어 놓은 것이 “모든 고통은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일어나므로(緣起), 그 조건과 원인을 제거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緣滅)”가 됩니다. 이것이 연기를 문장으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연기와 연멸의 연기법에서 박경준 교수가 특히 강조한 것은 ‘연멸’입니다. 연기만 말하고 연멸을 말하지 않는다면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고 부처님의 연기법을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조건발생과 함께, 반드시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로 시작되는 조건소멸이 설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기를 이해했을 때 “나는 고통에서 벗어났다. 나는 불사를 얻었다.”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게 됨을 말합니다.
연기법은 희망의 메시지
정평법회를 알리기 위하여 ‘귀인을 기대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이곳저곳에 알렸습니다. 글에서 “한사람과 마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사람의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그사람의 인생과 접하게 됩니다.”라 했습니다. 누군가 대화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혜를 힘들이지 않게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에 비하면 강연이나 법문을 듣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정평법회 홍보를 했음에도 그다지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바빠서일 것입니다. 특히 오월의 토요일에는 각종 행사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모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문을 통하여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식의 지평은 넓어집니다.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도 여러 가지 사정과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 님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인터넷에 공유하는 것도 정평법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는 사람들이나 가르침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월 정평법회에서 박경준 교수는 연기법의 진수를 한장짜리 프린트물에 요약하여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것,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마지막 멘트로서 “불교는 인간을 구제하는 종교입니다.”라 했습니다. 인간구제는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이라는 것이 조건발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소멸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건소멸하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고 더구나 불사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기법은 희망의 메시지라 했습니다.
2018-05-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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