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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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소식자들은 왜 경전을 무시할까? 생각과 담마가 충돌했을 때

moksha 2017. 11. 23. 14:40


한소식자들은 왜 경전을 무시할까? 생각과 담마가 충했을 때

 

 

이 세상은 환상일까? 어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꿈속과 같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환영이기 때문에 꿈 깨듯이 깨어나야 함을 말합니다. 꿈이 꿈 인줄 알면 깨닫는다고도 말합니다. 아마 이런 말은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중에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는 말의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꿈속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꿈속에서 사는 존재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꿈속의 나와 꿈속의 세상을 모두 인식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꿈속의 나를 소아(小我: i)라 볼 수 있고, 꿈꾸는 나를 대아(大我: I)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꿈꾸는 나는 꿈속에서 꿈속의 나를 포함하여 꿈속의 세상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꿈을 깬다는 것은 꿈이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꿈꾸는 나로 돌아 온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일까요? 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깨닫기만 하면

 

깨달음에 올인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깨닫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은 깨달음만 얻으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라며 울먹였습니다. 마음이 매우 여린 비구니 스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출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매우 힘듭니다.”라 했습니다. 나름 대로 공부를 했지만 만족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더 배우고 싶습니다. 도움을 주십시오.”라며 울먹였습니다.

 

마치 꿈에서 깨듯이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이 일거에 해결되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말하며 책상을 탕탕 치며 이것뿐입니다. 이것뿐이에요. 이것뿐이라니까요라 말합니다. 대체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말로는 설명이 안되니 책상을 치고 종을 치고 심지어 할을 하고 방망이까지 등장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을 만나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로부터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달 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에 말로서 문자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빠쩻까붓다 같습니다. 연기법으로 깨달음을 얻었지만 법을 전할 수 없는 연각불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위없다는 말은 무상(無上)을 말하며 빠알리어로는 아눗따라(anuttara)라 합니다. 영어로는 ‘nothing higher’라 합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이라 합니다. 최상의 깨달음이라 하여 아눗따라랑삼마삼보딩(anuttara sammāsambodhi)이라 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anuttarā samyak-sabodhim’이라 하는데 한자어로는 阿耨多三藐三菩提라 합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룬 자라 하여 부처님에 대하여 정등각자(正等覺者)’ 또는 무상사(無上士)’라는 칭호를 붙여 줍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위없는 깨달음,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윳따니까야 담마짝까왓따나경(S56.11)’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사성제로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순간에 대하여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라 했습니다. 아라한 선언을 함으로써 깨달음이 완성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깨달음에서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정(suddhi)이라는 말입니다.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청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철저하게 알고 닦고 버린 것을 말합니다.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3.7)’에서 부처님은 깨달은 자에 대하여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58)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린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성제의 경우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여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아는 것이 초전(初轉)이고,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고 하여  철저하게 닦는 것이 이전(二轉)이고,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라고 하여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을 때 삼전(三轉)이라 합니다. 이렇게 세 번 굴릴 때 세 번 다 공통적으로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라는 말입니다. 나머지 집성제와 멸성제와 도성제에 대해서도 세 번 굴립니다.

 

사성제에 대하여 세 번 굴리면 모두 12번 굴리게 됩니다. 이를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라 하는데 한문으로는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라 합니다. 우리말로는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라 합니다.

 

부처님은 사성제에 대하여 세 번 굴려서 완전하게 청정해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청정해졌음이라는 말은 ‘suddhi’의 과거분사형으로 ‘suddha’라 합니다. 청정해졌다는 것은 오염원이 남김 없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 , 치로 대표되는 번뇌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선언을 할 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akuppā me cetovimutti)”라 합니다. 여기서 (me)’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사성제로 깨달았습니다.

 

왜 청정을 말하는가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 이전의 마음으로 되돌아 가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아라한단계에서 없어진다는 들뜸(uddhacca)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이 소멸된 아나함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자만(mana), 들뜸(uddhacca), 무명(avijjā)입니다. 여기서 자만은 내가 누군데라는 비교에 따른 우월의식을 말합니다. 아나함에게 탐욕과 성냄이라는 거친 번뇌는 사라졌지만 내가 누군데라는 미세한 번뇌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면 이것 마저 사라져서 비교에 따른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완전 무아의 경지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자아가 미세하게라도 남아 있을 때 자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나함 단계에서 들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들뜬 다는 것은 마음이 동요(動搖)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나함에게는 욕망과 성냄이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미세한 동요일 것입니다. 색계나 무색계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들뜸이 일어날 때 동시에 욕망과 성냄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불선법뿐만 아니라 선법도 미세하게나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불선법이나 선법이 일어나면 업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윤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라한 단계에 이르면 이마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자아의 개념도 사라지고 들뜸도 사라집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 대하여 청정해졌음(suddha)’이라 합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청정한 상태가 되었을 때 재생을 불러 일으키는 그 어떤 업도 짓지 않게 됩니다. 악업이든 선업이듯 그 어떤 업도 짓지 않게 된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서 윤회하지 않게 됨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를 해탈지견이라 합니다. 경에서는 ‘yathābhūta ñāadassana suvisuddha라 하여 앎과 봄이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음으로 나타납니다.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

 

깨달음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 사람 이야기 다르고 저 사람 이야기 다릅니다. 각자 자신이 체험한 것을 듣고 있다 보면 공통적으로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예 경전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경전은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하여 불신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소위 한소식 했다는 자들의 이야기와 전혀 다릅니다.

 

경전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청정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번뇌의 소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 되는 번뇌의 소멸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청정해져야 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을 말합니다. 누군가 열반과 같은 궁극적 경지를 체험 했을지라도 번뇌는 남아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 되는 번뇌가 열반을 체험 했다고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합니다.

 

최대 일곱생이 필요하다

 

궁극적 경지를 체험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자를 수다원이라 하는데 이는 견도(見道)의 단계에 해당됩니다. 탐욕과 성냄 등 거친 번뇌와 자만과 들뜸과 같은 미세한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서는 최대 일곱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깨닫기만 하면 단번에 번뇌가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다함과 아나함이라는 수행도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최대 일곱생이 되었을 때 들뜸, 자만, 무명과 같은 미세한 번뇌가 소멸됩니다. 어느 단계에서나 열반과 같은 궁극적 경지를 체험할 수 있으나 남아 있는 번뇌는 수행을 필요로 함을 말합니다. 최대 일곱생과 관련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구족하였더라도 삼매가 그만하고 지혜가 그만하다면, 그는 작고 사소한 학습계율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것이 무능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근본청정에 순응하는 청정한 삶에 적당하고 계행에 효과가 있고 계행에 확고한 학습계율이 있는데, 그가 그 학습계율을 닦기 때문이다.

 

1)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최대한 일곱 번 다시 태어나는 님으로 최대 일곱 번 신들이나 인간으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2)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고귀한 가문에서 고귀한 가문으로 태어나는 님으로 두 번이나 세 번 고귀한 가문으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3)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다시 한번 태어나는 님으로 오직 인간으로 다시 한번 태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4)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감소시켜 한번 돌아오는 님으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와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A3.86)

 

 

앙굿따라니까야 학습계율의 경(A3.86)’에 실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았다고 막행막식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에 흐름에 든 자나 심지어 아라한이라도 학습계율을 지켜야 함을 말합니다. 그런 학습계율은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라 했습니다. 지키지 못할 것이라 하여 아예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반성하여 지켜 나감을 말합니다. 평생 지니고 배우고 지켜 나가는 것이라 하여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빅쿠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학습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학습계율을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닌 청정한 삶(brahmacariyā)’을 위해서입니다. 청정한 삶은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결박을 풀어 버리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궁극의 경지를 맛 보았다고 하더라도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라 봅니다. 그런데 이런 수행의 과정이 최대 일곱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번뇌가 모두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아라한이 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 번뇌는 존재를 윤회하게 합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어떤 이는 일곱생이 될 수도 있고, 두생이 될 수도 있고, 한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경전을 무시할까?

 

누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일상이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방송에서 깨달았다는 말을 합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도 깨달음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특별한 체험한 것에 대하여 깨달음이라 합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체험 한 것을 두고 깨달은 자라 합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경전을 무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믿지를 않습니다.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자에 대하여 하수로 봅니다. 문자에 갇혀 있다든가 경전을 맹신한다든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등으로 폄하합니다. 그렇다면 왜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이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경전을 무시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과의 충돌입니다. 자신이 말한 것과 경전의 가르침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열반이라 합니다. 느낌과 지각이 사라진 단계를 말합니다.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사라진 두 번째 선정, 호흡이라는 신체적 형성이 사라진 네 번째 선정, 그리고 지각과 느낌이라는 정신적 형상이 사라진 상수멸정을 말합니다. 이런 경험을 해도 번뇌가 소멸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최대 일곱생입니다. 그래서 계행을 지키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어야 깨달음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 또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고 말하는 자들은 초기경전에 없는 말을 합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은 경전을 불신합니다. 경전을 보지도 않습니다. 경전 보는 자를 하수중의 하수취급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상충(上衝)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말한 것이 틀린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경전이 후대에 편집되었다든가 등으로 부정합니다.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자들, 소위 한소식 했다고 하는 자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석가모니또는 고따마라 하여 친구이름 부르듯이 호칭합니다. 마치 자신과 동격으로 취급합니다. 이런 태도는 외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자신과 동격으로 취급 했을 때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한 말은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 하기 위해서라도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를 부정해야 만 하는 자신의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 하기 위해서라도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를 부정해야 만 하는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현명한 불자들은

 

항상 초기경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연각불은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어도 법을 펼치지 못합니다. 깨달음에 대하여 설명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살행을 하여 부처가 된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을 설했습니다. 오늘날 빠알리 삼장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한소식 했다고 하는 자들,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은 공통적으로 경전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론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들의 말을 믿을 것인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을지는 각자 판단의 몫이라 봅니다. 현명한 불자들은 지혜로운 판단을 할 것입니다.

 

 

2017-11-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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