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행복하여라! sukho Buddhānaṃ uppādo!

▣ 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 (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교를 생각한다/한국 힌두종, 조사불교, 선방불교,

[스크랩] 불교는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종교(宗敎)

moksha 2017. 11. 15. 14:29


불교는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종교(宗敎)

 

 

부처님 없는 불교

 

이제까지 150여곳 이상 사찰순례 다녔습니다. 개인적으로 다닌 곳도 있고 단체로 간 곳도 있습니다. 순례 갈 때 마다 블로그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2004년부터 다녔으니 올해로 13년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가 보지 못한 곳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나라 전통사찰이 900여곳이라 하니 평생 다녀도 다 못 볼 것 같습니다.

 

사찰순례 다니면서 느낀 점 하는 석가모니부처님이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대신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셔 놓은 곳은 많습니다. 극락전이나 비로전과 같은 전각입니다. 대웅전이라 칭하는 곳이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도 오래 된 천년고찰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깨진 것입니다.

 

절에 가면 당연히 석가모니부처님이 주불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비로자나부처님이 주불일 때 약간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무너진 듯 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이 절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없다또는 불교에는 부처님이 없다라 할 것입니다.

 

붕어빵에는 붕어빵이 없습니다. 붕어형태만 있을 뿐입니다. 붕어빵 속에는 팥으로 된 앙꼬만 들어 있습니다. 무늬만 붕어이고 이름만 붕어빵입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한국불교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어야 불교라 볼 수 있으나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 없는 불교만 있는 듯합니다.

 

강원에서도 부처님 그 분이 없었다!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 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을 포함하여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다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전통에 따른 것이라 봅니다. 또 깨달은 자는 모두 부처로 인정하기 때문일것이기도 할 것입니다한국불교에 불교의 창시자이자 교주라 볼 수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듯 합니다.

 

언젠가 불교TV 사이트에서 일아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천주교 수녀이었다가 스님이 된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스님은 강원에서 배울 때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강원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학과목에는 중국 조사스님들의 어록이나 대승경전은 있었지만 부처님의 일생이나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없었다고 합니다.

 

일아스님은 강원을 졸업후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부처님그 분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강원을 졸업하고 난 다음 부처님 그분을 알기 위하여 태국으로 미국으로 유학갔다고 합니다.

 

절에 가서도 부처님 그분이 보이지 않고 강원에서도 부처님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요즘은 강원에서도 부처님의 일생과 초기경전, 그리고 논장이 커리큘럼에 포함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아스님 시절과 비교하면 큰 변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여전히 부처님 그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불교에서 존재감 없는 부처님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은 2위 내지 3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로자나부처님이 1위라면 아미타부처님이 2, 3위는 석가모니 부처님 정도 될 것입니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3신불 사상에 따른 것이라 봅니다. 이렇게 한국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일까 조사스님이나 선사스님들은 부처님을 무시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살불살조(殺佛殺祖)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임제록에 실려 있다는 살불살조는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죽여라는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건 조사건 죽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의 몸에 상처가 나고 부모를 죽이면 오역죄(五逆罪)’라 하여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오역죄라 하면 “1)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2)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3) 아라한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4)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여래의 피를 흘리게 한 경우, 5) 승가를 분열시키는 경우라 합니다.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게만 해도 오역죄라 하여 무간업을 면치 못합니다. 그럼에도 조사스님들은 호기롭게 살불살조를 외쳤습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불살조의 진정한 의미는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우상타파라 볼 수 있습니다. 본래 내가 부처인데 따로 얻을 것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운문문언스님의 부처님 개밥론

 

조사스님들의 패기는 살불살조에 그치지 않습니다. 유튜브에서 본 자재만현스님법문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부를 옮겨 보면 석가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적에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했답니다. 하늘 위에 하늘 아래에 내가 오직 존엄하다는 말인데, 내가 만약 2600년 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몽둥이로 석가를 후려쳐 죽여서 배고파하는 굶주린 개에게 줄 것이다 그랬어요.”라는 말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탄생이야기를 할 때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 (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라 합니다. 이 말은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회자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아기부처님의 선언에 대하여 패죽여야 한다는 조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배고픈 개에게 먹이로 주어야 한다고 극악무도한 말을 했습니다.

 

대체 어떤 조사가 그런 말을 했을까요? 자재만현스님의 이어지는 법문에는 덕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덕산은 누구일까요? 부처님 탄생설화와 덕산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불교신문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편, 운문종의 개창자 운문문언 스님은 아주 끔찍한 말까지 해대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자 말자 주행칠보(周行七步)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외쳤다는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 죽여 개에게 먹이로 던져 주었을 것이다.”

 

(불교신문, 주장자 의지해 다리 끊긴 건너다 , 44칙 파초주장(芭蕉杖) - 파초의 주장자, 2011-01-05)

 

 

무문관 44칙에 있는 파초주장(芭蕉杖)’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재만현스님은 덕산이라고 했으나 이는 착오입니다. 불교신문에 따르면 운문종의 개창자 운문문언스님이 끔찍한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운문문언스님은 천상천하유아독존 운운하는 아기부처를 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패 죽여서 개밥으로 주었을 것이라 합니다. 운문스님이 이렇게 말한 것은 분별하지 않게 하고 본래면목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한 말입니다. 무분별의 경지를 알려 주기 위한 일종의 할과 방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끔찍한 말을 들었을 때 매우 잔인한 방법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쳐 죽여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재만현스님의 법문을 참조한 것은 살불살조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재만현스님의 영혼체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유아론적 견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불교라기보다는 자재만현식의 불교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능멸게송

 

임제어록의 살불살조이야기는 운문문언스님에 이르러서는 개밥론으로 이어졌습니다. 부처님을 모욕하고 가르침을 능멸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조사스님들의 패기는 선사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듯 합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서는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라 했습니다.

 

서산대사의 게송에 따르면 홀로 자재하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원상(一相圓)으로 표현 했습니다. 하나의 둥그런 원입니다. 마치 원불교의 상징인 ()’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일원상은 이름 붙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원상 대신 바이로차나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 또는 하느님, 브라흐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참나(眞我)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부처님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몰랐다 하니 전법제자라는 가섭도 모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한 것입니다.

 

조사스님들과 선사스님들의 어록을 보면 부처님이 능멸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깨달음을 위한 방편이라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언어어 문자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전승되는 것이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할과 방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살불살조와 개밥론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석가도 몰랐던 것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불완전한 것 또는 미완성된 것이라고 오해 받을 여지가 충분합니다.

 

불교에 대한 무지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 즉 선종의 영향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아스님이 강원에서 부처님에 대하여 전혀 배울 수 없었던 것도 조사스님들 가르침 위주이고 더구나 부처님을 폄하하고 심지어 능멸하는 분위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조사스님들은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전통은 오늘날 선종의 전통을 이어 받은 한국불교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는 듯 합니다.

 

몇 일전 페이스북에서 어느 법우님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미국학생들이 불교에 대하여 유물론적 시각으로 본 것에 대한 댓글을 단 것이 시발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윤회에 대한 것입니다.

 

중국불교에 경도된 사람들은 업과 윤회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논쟁을 한 K법우님도 그랬습니다. 더구나 K법우님은 과학적 지식에 따라 유전자가 윤회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른바 유전자윤회론입니다. 유전자윤회론은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교수가 불교닷컴 칼럼에서 수 차례 주장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차례 반론 글을 쓴 바 있습니다.

 

K법우님과 논쟁에서 느낀 것은 한마디로 불교에 대한 무지입니다.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이처럼 경전적 근거 없이 불교에 대하여 말하다 보니 유전자윤회론을 말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명백한 단멸론입니다. 그런데 단멸론인줄 조차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과학불교 하자는 건가

 

어리석은 자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면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합니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자신의 무지를 모르고 아는 체 했을 때 대단히 어리석은 자라 합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전혀 공부를 하지 않은 자가 불교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은 업과 내생, 그리고 윤회 같은 것은 없는 것이라 합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중립을 지키면 다행을 것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근거도 대지 못하면서 없는 것이라 한다면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현의 말씀 중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아는 것은 큰 지혜이다.”라 합니다. 법구경에서도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 했는데,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하여 솔직하게 모른다라고 하면 그는 더 이상 어리석은 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만 믿는 감각적 인지주의와 오로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는 과학적 검증주의’, 이 두 가지로 무장하여 불교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 검증주의라는 잣대로 불교를 재단했을 때 이를 아마 과학불교라 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에 견줄만한 것이 없다

 

불교를 과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불교를 철학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엄연히 종교입니다. 종교로서 불교는 으뜸 가르침입니다. 한자어 마루 종()’자가 의미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 보배의 경(Sn 2.1)’에서도 이 세상과 내세의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stn224)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 가르침에 견줄만한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난 후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선언했습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무상정득정각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합니다. 그럼에도 후대 선사들은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라며 가르침을 능멸하는 듯한 게송을 지었습니다.

 

불교는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종교

 

불교가 종교인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 더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견줄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용마루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Seyyathāpi bhikkhave, kūāgārassa yā kāci gopānasiyo sabbā tā kūagamā kūaninnā kūasamosaraā, kūa tāsa1 aggamakkhāyati.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누각의 어떤 서까래든지 모두 용마루로 향하고, 용마루로 기울고, 용마루로 모이고, 용마루를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한다.”(S45.141)

 

 



용마루는 지붕가운데 가장 높은 수평 마루를 말합니다. 마루는 방과 방사이나 방 앞에 지면으로부터 높이 떨어지게 하여 널판지를 길고 평평하게 깐 공간을 말합니다. 용마루라고 했을 때 지붕의 꼭대기를 말하며 집에서 가장 높은 곳을 뜻합니다. 용마루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kūā입니다. 영어로는  ‘the top, peak’의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뾰족지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라 합니다. 이를 한자어로 옮기면 불교(佛敎)라 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불교는 용마루처럼 으뜸 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과 견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교에 대하여 단지 과학으로 불교, 철학으로서 불교로 보고자 하는 듯 합니다. 불교는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종교입니다.

 

 

2017-11-15

진흙속의연꽃


출처 : 진흙속의연꽃
글쓴이 : 진흙속의연꽃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