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남쪽 아완띠까지
부처님의 출현하셨다는 소식은 남쪽 멀리 아완띠(Avanti)까지 전해졌다. 아완띠국 짠다빳조따(Caṇḍapajjota)왕은 부처님을 초청하기 위해 깟짜나(Kaccāna, 가전연迦栴延)와 일곱 사람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깟짜나는 웃제니(Ujjenī) 출신으로 국사의 아들이었으며 흑인이었다. 빳조따의 요청을 전달하기 위해 사왓티를 방문한 여덟 사신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신들의 임무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모두 비구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깟짜나가 수행의 과위를 가장 빨리 성취하였다. 논리적 사유와 언변이 뛰어났던 깟짜나는 부처님의 간단한 설법을 자세히 분석해 설명하고 논의함에 있어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고 칭찬받았다. 출가의 목적을 완수한 후에야 깟짜나는 부처님께 간청하였다.
“부처님, 아완띠의 왕 짠따빳조따(Caṇḍapajjota)가 부처님을 초청하였습니다. 아완띠국을 방문해 주십시오.”
잠시 침묵하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가도 충분합니다.”
부처님의 허락을 받은 깟짜나(Kaccāna, 가전연迦栴延)는 고향 웃제니(Ujjenī)로 돌아와 왕의 동산에 머물렀다. 그의 귀국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완띠(Avanti)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어 출가를 원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출가시켜 구족계를 주려면 3사(師) 7증(證)1, 즉 최소 열 명의 비구가 필요하였다. 당시 변방이나 다름없던 아완띠국에서는 열 명의 비구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출가를 원하는 이들을 다른 승가에 보내자니 가장 가까운 승가도 멀고 먼 꼬삼비(Kosambi)국에 있었다. 비구들은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생명처럼 여겼다. 부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계율을 제정할 수 없었고, 함부로 고칠 수도 없었다. 깟짜나는 부처님을 뵙기 위해 사왓티의 기원정사로 떠나는 제자 소나꼬띠깐나(Soṇakoṭikaṇṇa)에게 아완띠(Avanti)국의 사정을 말씀드리게 하였다. 그리고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계율의 적용을 적절히 가감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완띠(Avanti)국의 사정을 고려해 3사 2증만으로 구족계를 줄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만들었다. 또한 검고 딱딱한 아완띠의 토질을 고려해 두꺼운 신발을 신도록 허락하였으며, 더위가 심한 지역임을 고려해 보름에 한 번으로 정해진 목욕을 보다 자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양이나 염소나 사슴 등의 가죽으로 만든 이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계율의 조항이 편의에 맞춰 수정됨으로써 아완띠(Avanti)에 새로운 승가가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 3사(師) 7증(證) : 수계3사(受戒三師)란 계화상[戒和尙, =수계사(授戒師):계를 주는 스님], 교수사(敎授師:수계하는 제자의 위의작법을 가르쳐 주는 스님), 갈마사(葛磨師:계단에서 계를 받는 사람에게 지침이 되는 스님)를 말하고 칠증(七證)이란 수계 자리에 입회하여 그의 수계를 입증하는 7명의 스님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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