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Sati)와 쌈바자나(Sampajañña)
초기불교의 수행(명상) 관련 가르침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대념처경(大念處經)이 있다. 이 대념처경에 쌈빠자나1[Sampajañña, 지(知), 자각(自覺), 알아차림, 분명한 앎]과 사띠2[Sati, 념(念), 마음챙김, 새김, 마음새김]이라는 심리적 기능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먼저 알아차림(知, 自覺, Sampajañña)부터 살펴보면 이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을 그때그때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알아차림(知)이란 무엇인가 (중략)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볼 때나 관찰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구부리거나 펼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겉옷과 발우와 옷을 착용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중략)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잠들거나 깨어나거나 이야기할 때나 침묵할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
우리는 일상 가운데 배고플 때 밥 먹고, 무슨 일인가에 매달려 열심히 일하고, 졸리면 잠자는 그런 생활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의 생활을 대부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서 순수하게 알아차림으로 지내는 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돌이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밥을 먹을 때 밥을 먹는 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저를 들고 밥을 한 수저 뜨고 입으로 가져가 입안에 넣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입안에 넣고 씹는 따위의 동작을 현재시점으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며 먹는 시간은 극히 짧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대부분의 시간을 습관적인 상념으로 이러저러한 생각 속에서 망상과 잡념과 번뇌와 더불어 밥을 먹고 있다.
다른 일상사도 대체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일상사에 대하여 알아차린다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현재의 순간을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지나간 과거의 회한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 휘말려 현재의 순간을 산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욕구와 불만과 흐릿함에 휘말려 살고 있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현재의 순간을 벗어남으로써 부풀려진 허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직면해 보면 별 볼일 없는 일들에 지레 겁을 먹고 허둥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명확한 알아차림으로 이 순간에 머물 필요가 있다. 현재에 충실하여 습관적인 상념과 망상과 번뇌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의 본래 모습과 사물의 진실된 모습을 여실하게 보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쌈빠자나(Sampajañña), “내가 지금 …을 하고 있다”라는 자각(自覺)하는 것을 말한다.“내가 걷고 있다”,“내가 앉아 있다”,“내가 어떠한 기분을 경험하고 있다”와 같은 자각(自覺)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내가 말할 것이다”,“내가 할 것이다”,“내가 올 것이다”,“내가 갈 것이다”,“내가 앉을 것이다” 등과 같이 깨어있음이 있는 것을 사띠(Sati)라 한다.
사띠(Sati, 마음챙김, 새김, 念)이란 정처없이 과거와 미래로 넘나드는 마음을 현재의 대상에 붙잡아두는 것을 말한다. 마음새김을 하다보면 언제 잡념이 떠올랐는지 모른 채 한참을 방황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알아차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러한 알아차림에 의해‘현재의 상태로 마음을 돌리는 것’을 마음새김이라고 하며, 이어서‘되돌린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ㆍ지속하는 것’을 마음새김이라 한다.
다시‘그러한 상태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는 것’을 알아차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知, Sampajañña)과 새김(念, Sati)은 위빠사나 통찰을 이끄는 양 날개의 구실을 한다.
새김(念, Sati)의 원래 의미는 잊지 않음[불망(不忘), Saraṇa]이다.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제반 현상들을 방기(放棄)하지 않고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경전에서는 ‘감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즉 육근(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을 통한 감관에 의한 현상들에 대해 기민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탐욕이나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마음이 발생했을 때 그들을 지긋이 주시하다 보면 어느새 저절로 누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새김은 내면을 다스리는 심리적 제어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 마음새김은 사마타ㆍ위빠사나 전체를 포함하면서 불교명상을 특징짓는 고유 명사이다.
예컨대 위빠사나의 전형적인 실천 기법으로 알려진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a) 수행을 풀어 옮기자면‘마음새김을 확립하는 네 가지 명상’이 된다. 또한 호흡에 대한 관찰 명상인 입출식념[入出息念, 안반수의(安般守意),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을 옮기자면‘들숨ㆍ날숨에 의한 마음지킴’,‘들숨ㆍ날숨에 의한 마음챙김’,‘호흡새김’이 된다.
이들은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명상 기법으로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와 평온을 의미하는 사마타의 경지를 포함한다. 즉 이들을 실천하다 보면 마음의 고요도 얻을 수 있고 사물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새김은 위빠사나를 가능케 하는 핵심 원리인 동시에 위빠사나와 사마타 모두에게로 연결되는 이중적 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 삼빠쟌나(sampajañña) : saṃ(함께)+pra(앞으로)+√jñā(알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 그대로 ‘대상에 대하여 충분하고 분명하게 앎’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clear comprehension, full awareness 등이라 한다. 수행과 관련된 경에서 사띠(sati)와 삼빠쟌나(sampajañña)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난다. 사띠(sati)가 정해진 대상에 마음을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면 삼빠쟌나(sampajñña)는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은 sati-sampajñña처럼 함께 쓰이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이 둘을 한데 묶어 정념정지(正念定知)라고 번역했다. [본문으로]
- 사띠(sati) : √smṛ(기억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PED에서 ‘memory, recognition,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 of mind, mindfulness,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conscience, self-consciousness.’라고 설명되듯이, 그 1차적인 의미는 ‘기억(記憶), 억념(憶念), 유념(留念)’이고, 2차적인 의미는 ‘깨어있는 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각성, 명료한 마음, 침착함, 자각, 의식’ 등이다. 그래서 ‘알아차림’, ‘마음챙김’, ‘새김’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파지하고 대상에 확립하고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는 것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가능하게 하는 선한 마음의 작용이다. 그리고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능력(五力, pañca-bala) 중의 하나이며,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 bojjhaṅga)중의 하나이다. 또한 넓은 의미로는 선한 과보의 마음(kusala-vipāka-citta)과 아름다운 과보의 마음(sobhana-vipāka-citta)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마음의 작용(cetasika)들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염(念)이나 억념(憶念)으로 번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mindfulness라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