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갠지스 강의 소금 덩어리
19. 갠지스 강의 소금 덩어리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이전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 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한다.
그러나 업을 결정론(決定論)이나 운명론(運命論)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다소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법하고 계신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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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 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
[수행승들]“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적은 죄악을 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세상에 어떤 사람은 똑같이 적은 죄악을 지어도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소금덩어리의 경(Loṇaphala Sutta, A3:99)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의 물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한 잔 속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 그릇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 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소금물의 농도가 다르게 되므로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업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 그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때문에 업 이론은 기계론적인 이론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원리는 붓다가 코살라국의 빠세나디왕에게 한 설명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마치 저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은 한량이 없지만 그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을 없애지 않고서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도 못되는 것과 같소.”
즉 같은 넓이의 밭에 같은 양의 종자를 심는다해도 밭의 상태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