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비구를 몰아낸 신도들, 승가의 문제는 재가의 문제
그 사람의 가치는 장례식장에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장례식장에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다면 잘 산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썰렁하다면 잘 못 산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장례식 참가 숫자로 파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정말 아쉬운 사람이라면 “참 안됐다. 더 오래 살아야 하는데.”라 할 갑니다. 그러나 피해만 끼친 사람이라면 “그 놈, 참 잘 죽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생즉사사즉생(生卽死死卽生)
명진스님의 단식이 오늘로서 7일째를 맞고 있습니다. 하루 전에 감식을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8일째 입니다. 생수와 소금으로만 버티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한 효소단식과는 달리 생수단식은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에 해 본 사람이 아니면 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단식하는 것은 현재 한국불교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단식을 선언했을 때 대중들은 “스님, 안돼요”라며 말렸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 한몸 희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생즉사사즉생(生卽死死卽生)’의 심정으로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저녁 7시가 되면
단식하던 첫날 우정국 공원에 텐트가 쳐졌습니다. 국가소유의 땅에 함부로 텐트 칠 수 없지만 한번 그렇다고 한번 쳐진 텐트를 걷어 갈 수도 없습니다. 두 동의 텐트가 쳐 졌습니다. 한동은 명진스님이 기거하며 손님 맞는 텐트이고, 또 하나는 자원봉사자용 텐트입니다.
일요일 오전 명진스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오전 10시에 일요법회가 있다고 하길레 시간 맞추어 간 것입니다. 일요일 오전 비가 주룩주룩 끊임없이 내렸습니다.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오래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이전 날 H스님 찾아 간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로수좌스님으로서 승려대회찬성은 못할망정 차라리 중립을 지켜 주면 좋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것에 대하여 공감했습니다.
우정공원 단식현장에는 자원봉사들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조를 짜서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단체 사람들, 제불교재가단체 사람들, 명진스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교대로 밤샘하는 것입니다. 매일 저녁에는 지지자들의 촛불의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저녁 7시가 되면 LED촛불을 들고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힘을 실어 줍니다.
다녀간 명망가(名望家)들을 보면
카톡과 밴드를 통하여 명진스님의 근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실시간으로 올려 주는 사진과 글을 통하여 누가 다녀 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로 유명인사들에 대한 것입니다.
단식하던 첫날에는 윤영찬 수석이 다녀 갔습니다. 청와대 국민소통위원장입니다. 밤 늦게 찾아 왔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에 사람들은 크게 고무 되었습니다. 총무원측에서 용역을 동원하여 텐트를 부수고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고 걱정했으나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다녀 가는 바람에 그런 우려는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전하는 사진을 보면 이 나라의 명망가는 모두 한번쯤 다녀 가는 것 같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다면 도올 김용옥, 개그우면 김미화, 방송인 정봉주, 만화가 박제동, 시민운동가 백기완 등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단식현장을 찾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회에 영향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일까 우정공원 단식현장은 마치 성지순례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명진스님 매력은
유명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찾는 것 같습니다. 이로 보았을 때 명진스님의 행경이 얼마나 넓었던 것인지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명진스님은 매력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경청일 것입니다. 이는 명진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것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관심을 가져 주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감해 주는 것 하나만 해도 사람을 끌어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 주고 나를 이해해 준다고 생각했을 때 호감을 갖게 됩니다. 세월호유가족, 용산참사유가족, 쌍용자동차노동자들을 법회현장에서 볼 수 있는 것도 공감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승가의 문제는 곧 재가의 문제
명진스님은 이번 단식으로 스타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명진스님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사이었으나 이번 단식을 계기로 하여 더욱 더 널리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단식한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67세에 이르는 나이에 목숨을 걸고 단식하는 것은 불교현실이 급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한국불교는 쇠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승원장 8년 동안 불자수가 3백만명이 감소했는데 자승원장이 지명하는 사람이 또 다시 총무원장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또 얼마나 빠져 나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승가공동체회복입니다.
자승원장 8년 동안 승가공동체는 붕괴되었습니다. 세속에서와 같이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승가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찰을 소유하고 권력을 가진 2% 가량의 스님들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수의 스님들은 가진 것이 없어서 떠돌고 있고 각자도생하고 있습니다. 개인사찰이 수 천 개 되는데 바로 이것이 승가공동체 붕괴의 직접적인 증거일 것입니다.
승가의 문제는 곧 재가의 문제입니다. 불교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 교단이기 때문에 승가가 잘 못되면 재가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불자수 감소로 알 수 있습니다. 불자수가 감소되면 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하고 문화재 보호구역에서나 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의식 있는 불자들과 스님들이 촛불을 들게 된 것입니다. 이에 명진스님은 목숨을 건 단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못된 비구를 몰아낸 신도들
승가공동체의 회복이 한국불교가 중흥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여법한 승가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승반속의 무리들을 몰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놀랍게도 재가자들이 못된 출가자들을 몰아 낸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담미까의 경(A6.54)’이 있습니다. 존자 담미까가 고향에 살았는데, 그는 고향의 일곱 승원에 모두 살았습니다. 그런데 존자 담미까가 객승을 비난하고 매도하고 상해하고 구타하고 욕설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상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절을 차지한 주지가 객승에게 푸대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는 객승을 위한 객사를 모두 없애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사찰이 개인화 되면서 공공성이 배제 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잘 곳이 없어서 여관이나 찜질방을 전전한다고 합니다. 만일 승가공동체가 회복되면 사찰은 공적으로 사용되어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존자 담미까는 고향에 있는 사찰에 살면서 주인행세를 했습니다. 객승이 찾아 오면 비난하고 매도하고, 심지어 구타하기 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신도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재가신도들은 고향사찰을 위하여 탁발음식과 옷과 와좌구, 의약품 등 필수품을 제공했으나 객승이 오래 있지 못하고 떠나 버린 이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에 신도들은 객승을 푸대접하는 존자 담미까를 쫓아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존자 담미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가신도들]
“존자여, 존자 담미까는 이 처소를 떠나주십시오.
그대는 이곳에서 충분히 살았습니다.”(A6.54)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재가신도들이 못된 비구를 쫓아 내는 것입니다. 꼬삼비비구들의 경우 재가신도들이 공양을 거부하여 항복 받아 내었는데 이번에는 재가신도들이 합심하여 깡패 같은 비구를 쫓아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훈계
존자 담미까는 결국 절에서 쫓겨 났습니다. 쫓겨 나서 고향의 다른 절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쁜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도 객승을 푸대접하고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려서 쫓겨 났습니다. 고향의 일곱 사찰에서 모두 쫓겨난 것입니다.
고향에서 쫓겨난 존자 담미까는 부처님을 찾아 갔습니다. 자신이 쫓겨나게 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니그로다나무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수행자의 의무에 대하여 말씀 했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 담미까여, 여기 수행자가 욕설하지 않고, 욕설로 갚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분노로 갚지 않고, 매도 하지도 않고, 매도로 갚지도 않는다.”라며 수행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음 말씀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쑤넷따 등의 교단 창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바른 견해를 갖춘 한 수행승
부처님 제자를
악한 마음을 품고
사람이 매도한다면
그 사람은 그 보다 더욱
많은 악덕을 낳으리.
일체의 견해를 버린
존경할만한 님을 공격하지 말라.
그는 고귀한 님의 무리에서
일곱 번째라 불리네.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여의지 못해
다섯 가지 감각능력과
믿음, 새김, 정진
멈춤, 통찰이 여린 자가 있어도
그런 수행승을 공격하면,
먼저 자신을 해치고
자신을 해치면,
나중에 다른 사람을 해치네.
자신을 안으로 수호하는 자는
밖으로도 잘 수호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수호하라.
항상 손해 없는 현자라 불리리.”(A6.54)
부처님은 게송으로 존자 담미까의 악행을 꾸짖었습니다. 고향의 일곱 사찰에서 바른 견해를 갖춘 한 수행승 부처님 제자를 악한 마음을 품고 매도한 것입니다. 이에 존자 담미까는 신도들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 담미까여, 그런데 한 사람이 단 한 분의 바른 견해를 갖춘 사람을 악한 마음으로 욕설하고 매도한다면, 그는 그 때문에 그 보다 더욱 많은 악덕을 낳을 것이다.” (A6.54)라며 훈계한 것입니다.
용주사 신도비대위
앙굿따라니까야 ‘담미까의 경(A6.54)’을 보면 참으로 놀라게 됩니다. 그것은 신도들이 못된 비구를 쫓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꼬삼비에서와 같이 공양거부는 수동적인 저항이 아니라 절에서 깡패 같은 비구를 쫓아 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악행을 일삼는 스님, 스님 같지 않은 스님을 쫓아 낼 수 있습니다. 용주사 신도비대위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2교구 본사 용주사는 은처승이 주지로 앉아 있습니다. 처와 자식이 있는 스님이 벌써 3년 째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자승총무원장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은처승을 조치하지 않는 것은 약점이 잡혀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서로 같은 운명 공동체라 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 사태가 3년째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은처승으로 인하여 용주사 신도들이 비대위를 구성하여 은처승 퇴출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외침은 가르침에 따르면 정당한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담미까의 경’에서는 깡패 같은 못된 비구에 대하여 “존자여, 존자 담미까는 이 처소를 떠나주십시오. 그대는 이곳에서 충분히 살았습니다.”(A6.54)라며 쫓아 내었습니다. 부처님도 이런 사실을 알고 “그대는 도처에서 쫓겨났고 바로 도처에서 쫓겨난 그대가 나를 찾아 온 것이다.”라 하여 사실상 추인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이 합심하여 ‘못된 승려는 쫓아 낼 수 있다’는 근거가 되는 경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롱하고 모욕하고
명진스님은 하루하루 목숨을 건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만 먹지 않아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한끼만 먹지 않아도 배고 고파 죽을 지경인 사람에게 있어서 8일 째 단식은 위태로운 것입니다. 더구나 단식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교신문과 법보신문에서는 스님이 단지 자승원장의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조롱하고 모욕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조롱과 모욕에 스님은 기자들에게 “법보, 불교신문은 기본적으로 내가 쓰레기 취급을 한다. 더 이상 내 앞에 있지 말고 가시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사를 올바로 쓰면 얼마든지 대답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이에나가 된 불교신문과 법보신문 기자들은 명진스님 단식현장에 보이지 않습니다. 쓰레기들이라 했으니 쓰레기 기사만 양산하는 기레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기자는 “명진 스님의 단식이 정말로 참회에 있다면 산사가 적합하다.”라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이에 시를 하나 써서 카톡과 밴드에 공유했습니다.
불교에도 하이에나가 있다네.
블교신문과 법보신문이라네.
스님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마구 물어 뜯는다.
명진스님이 말했다.
"법보, 불교신문은
기본적으로 내가
쓰레기 취급을 한다.
더 이상 내 앞에
있지 말고 가시라”라고.
비난 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는 자,
입에 도끼를 든 것처럼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
청정한 자, 허물 없는 자를
해코지하면 악과보 받는다.
야차의 금강저로 머리가
일곱 조각 터지는 과보받는다.
불교신문과 법보신문은 기득권을 대변하는 보수신문입니다. 자승원장과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 됩니다. 설령 그가 유명한 선승이라 해도 반대편에 서 있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비난과 비방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원로수좌스님 중의 한사람은 승려대회를 반대합니다. 아마도 불교신문과 법보신문을 의식해서인지 모릅니다. 자승원장의 반대편에 섰을 때 조롱과 모욕, 비아냥을 당했을 때 그 동안 쌓아 올린 명예도 실추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기자들은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단지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하이에나처럼 물어 뜯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갚을 빚을 갚을 때가
명진스님 단식현장은 순례지가 된 듯합니다. 마치 성지순례하듯이 각계각층 유명인사들이 찾아 옵니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스님의 활동과 관련 있습니다. 스님은 안거중에는 선방에서 정진하지만 해제철이 되면 고통받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갑니다. 이런 세월이 수 십 년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텐트를 찾는 시민사회단체의 유명인사들이 줄을 잇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느 노동운동가는 ‘진보와 운동에도 의리는 있다’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노동·시민·민중운동 할 것 없이 한국 진보운동은 잘 안다. 어떤 단체든, 어떤 투쟁이든, 스님 명진, 그가 필요해서 그에게 손을 내밀면, 그는 두말없이 우리 손을 잡아 줬다. 육신이든 이름이든 기금이든 뭐든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의 든든한 벗이었다. 앞장서서 이명박근혜 일당에 맞선 연대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런 그가 단식을 한다.
이제 우리가 손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30년 넘게 우리 손을 잡아 줬던 명진스님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 아닐까. 의리? 그렇다. 의리! 진보에도, 운동에도, 반드시 의리가 있어야 한다.
(한석호님, 진보와 운동에도 의리는 있다. 불교닷컴 2017-08-21)
노동운동가 한석호님은 의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명진스님에 대하여 ‘30년 동안 우리 손을 잡아 준 스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소외받는 자들 앞에 반드시 나타났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갚을 빚을 갚을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이번 8.24 5차 보신각 목요촛불법회는 시민사회단체도 공동으로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자원봉사자들
카톡방에는 명진스님을 찾는 수 많은 인사들의 사진이 실시간으로 올라 옵니다. 모두 과거에 인연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물에 빠졌을 때 손을 내미는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는 첫날 방문한 청와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도 있습니다. 아마 대통령의 의중이 실렸을지도 모릅니다. 명망가들은 오고가지만 명진스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제불교단체와 시민단체 자원봉사들이 조를 짜서 요일별로 밤샘하며 지켜 주고 있습니다.
개그맨 김미화, 도올 김용옥,
화가 박제동, 방송인 정봉주,
청와대 윤영찬, 시민운동가 백기완 등
수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갔습니다.
또 수 많은 명망가들이
찾아 올 것입니다.
모두 스님을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들 입니다.
사람들은 객처럼 오고 갑니다.
절의 주인은 마을사람이듯이,
스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름 없는 불자들입니다.
무명의 불자가 삼배 올립니다.
봇물 터지듯이, 요원의 불길처럼
이번 5차 8.24 목요촛불은 규모가 더 커질 것이라 합니다. 더구나 불교신문이 단지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수불스님과 안국선원을 비난하자, 안국선원에서는 대놓고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마치 봇물 터지듯이, 요원의 불길처럼 촛불이 타오를 것 같습니다. 마치 작년 광화문촛불을 연상케합니다.
2017-08-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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